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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신학

야곱과 발람의 신비체험, 무엇이 달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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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계시를 체험한 야곱과 발람

   

 

▲조덕영 박사.

하나님의 초월 계시

 

성경은 초월의 신비로 가득 찬 책이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마다 택한 자를 통해 강력한 초월적 계시를 통해 자신의 우주적 섭리의 여정을 깨닫게 하셨다. 그 초월적 계시는 내재(內在)의 삶을 사는 인류에겐 신비한 체험으로 인식된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솔로몬, 엘리야와 엘리사, 마리아와 요셉. 사도 바울 등은 그 같은 초월 계시를 경험한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초월 계시를 체험한 두 사람, 야곱과 발람

 

꿈에서 하늘로 오르내리는 천사들의 사닥다리를 목격하고,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의 신비 체험은 전무후무한 초월 체험이었다. 그런데 여기 특별한 신비 체험가가 한사람 더 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 여정에 함께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 성경에 무거운 난제를 하나 던지고 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출신 발람이다. 성경의 여러 인물 가운데서도 야곱과 발람 이들 두 사람의 신비 체험은 정말 유별나다. 두 사람 모두 천사 체험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야곱은 초월적 존재와 씨름을 했는가 하면 발람은 짐승(나귀)의 방언을 들었다. 성경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 체험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 이들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야곱은 참으로 복을 누린 사람이었다. 창세기 종반부(창 48-50장)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들 두 사람과 관련된 창세기 종반부와 민수기 22-24장 본문에 담긴 영적 진리 속으로 찾아들어 가보자.

 

1. 초월자와의 신비 체험-만남

 

​하나님을 만난 사람 야곱(창 48: 1-3절)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만남이 좌우한다. 야곱은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 말년의 행복을 누린다. 그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의 병문안을 왔다. 자기 아들 요셉이 문병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야곱은 힘을 내어 침대서 일어나 앉는다. 야곱은 만남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이 누리는 모든 복은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루스 땅에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19km 지점에 위치한 가나안 원주민 도시 루스는 본래 '살구나무'란 뜻이나 '길을 잘못 들어갔다'라는 의미도 있는 데. 길을 잘못 들어갔어도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야곱이 길을 잘못 찾아간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로 바꾸어주었다.

 

하나님과 예언자(점쟁이) 발람(민 22-24)

 

메소포타미아 유브라데 강변 브돌에 살았던 발람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다. 발람이 일종의 예언자였다는 것은 민수기(22-24장)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그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민 23:10). 그러나 만남이 전부는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만났고 귀신도 예수님을 만났다. 그렇다면 발람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을까? 발람은 야곱 못지않은 신비 체험자였음에도 성경은 발람에 대해 아주 충격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비록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모압 왕 발락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발람이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얼어나게 한 자였으며(민 31:16) 모세의 명령에 따라 결국 비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민 31:8).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엡 4:13).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면 거기에 영생이 있다(요 17:3).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yada")는 "관계한다", "경험한다"는 의미로 사귐과 지속적 관계 속에서 안다는 의미이다. "믿는 것"을 포함하는 이 말은 칼빈의 말처럼 "신앙의 지식"인 것이다. 이 믿음의 지식이 아니라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였어도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 된 만남과 앎이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는 발람과 같은 자들이 과연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2. 땅의 복

 

땅에서 누리는 복을 받은 야곱(창 48: 4절)

 

인간이 땅에서 바라는 두 가지 큰 소망이 있다. 바로 자손과 땅의 복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영원한 기업의 땅은 단순히 팔레스틴 땅만이 아니었다. 그 기업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렇게 "야곱의 땅"은 이 세상 땅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기업의 땅이었다.

 

발람의 땅(민수기 22장)

 

발람도 땅의 복을 구했을 것이다. 유브라데 강변 브돌에 살았던 발람의 부친 브올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는 알려진 가문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모압 땅까지 알려졌고 그가 재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만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그는 여호와를 통해 점 치는 일을 통해 땅의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의 이름 "발람"은 바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사람"이라는 탐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모압 왕 발락이 돈으로 예언자 발람의 신통력을 사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발람의 명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발람은 야곱과 달랐다. 비록 땅에서 게걸스럽게 취하고 명성을 누렸어도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모세를 통해 칼에 맞아 죽었으며 야곱처럼 영원한 자손도 영원한 기업도 남기지를 못하였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여 명심하라! 삯을 좋아하는 "돈의 발람"(유 1:11)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 땅은 썩어질 땅이요 탐욕의 땅이요 죽음의 땅일 뿐이다.

 

3. 참된 복

 

축복을 위임 받은 야곱(창 48: 5-9절)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손자가 아닌 친 아들처럼 대우하였다. "내 것이라"(창 48:5)는 "내 소유가 되었다"는 뜻으로 요셉의 아들, 자신의 두 손자를 아들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을 위임 받은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사랑을 베푼다. 야곱이 에브랏(에브라다의 준말, 곧 베들레헴) 길에서 장사한 요셉의 친모인 라헬은 야곱이 누구보다 가장 사랑했던 아내였다(창 35: 16).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긴 야곱(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바로 그 축복을 베풀었다.

 

요셉이 야곱에게서 실제적 장자의 명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셉은 야곱이 진실로 사랑한 라헬의 아들이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갑절의 복(장자에게만 내리는 복)을 내려 요셉의 두 자녀를 자신의 친자녀들처럼 상속 인정하였다. 그것은 육적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불륜 관계를 맺어 침상을 더럽힌(역대상 5:1) 사건도 원인이 되었다. 우리나라 대동종친회도 유사한 데 가장 영향력 있는 실제적 힘을 발휘하는 집안은 대종손 집안이 아니라 가장 번창하고 출세한 지파가 가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비록 장자권은 요셉 후손들에게 넘어갔으나 신앙적 파워와 영향력은 또한 달랐다. 왕의 지팡이를 쥔 지파는 유다 지파였다. 성경은 육적 장자가 신앙적 장자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민 23-24)

 

발람의 제사에도 제단이 있고 희생물이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왕 발락에게 전할 말을 친히 계시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참 된 선지자가 아니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수 13:2). 발람이 칼 맞아 죽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였다(민 31:8). 모압 왕 발락이 급하게 친히 찾을 정도로 세상에서 그의 삶은 부요하고 유명한 삶이었는지 모른다. 남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여호와 하나님과 친히 만나는 신비 체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 분명하게 삯을 위한 어그러진 삶이요(유 1:11) 바른 길을 버리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다가 말 못하는 나귀에게조차 책망 받은 삶(벧후 2:14-16)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런 삶을 사는 자칭 교회유명지도자들이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가! 계시록은 믿는 이들(이스라엘 백성들)을 꾀는 그런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계 2:14).

 

 

4. 예비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복(창 48: 10-11절)

 

1) 말년이 행복한 야곱


빛 반사가 많은 광야에서 오랜 기간 태양빛에 노출되면 시력에 나쁜 영향이 오게 된다. 147년을 산 야곱의 눈이 쇠하여 진 것은 당연했다. 그런 면에서 120세까지 눈이 쇠 하지 않은 모세는 대단한 복을 누린 사람이었다. 비록 눈을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야곱은 노년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요셉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까지 데리고 문병 온 것에 대해 야곱은 너무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발람은 달랐다. 그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은 모세로 인해 그만 멈추어버렸다.

 

2) 야곱과 동행하신 하나님


야곱은 요셉을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요셉의 아들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야곱은 자상하게 준비하시고 동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손자들에게 입 맞추고 끌어안았다. 최고의 행복감의 표시였다. 모든 것은 야곱과 동행하시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섭리였다. 발람은 달랐다. 하나님은 만났으나 발람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인가?

 

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복


얼핏 보면 야곱은 대단히 험악한 삶을 산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한 그의 삶은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의 복은 크다. 발람과 달리 야곱은 하나님이 인정한 진정한 믿음의 거인이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