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가?
예수 계시 속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Vestigium Trinitatis)
인간은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다. 육체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초월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의식할 뿐이다. 계시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인식이란 주로 유비(analogia)를 통해 전해진다. 초월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그 흔적이 피조세계 속에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롬 1:20). 토마스 아퀴나스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원인이기에 그 결과로서 창조 질서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유사성"(similitudo)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자연 계시 안에서 우리 인류에게 당연히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주시지 않았을까 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
어거스틴은 이 희망을 가진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이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다.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주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당연히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이 복음의 방해물인 것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부족함에도 우리 인간은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그렇게 철저히 비판하지 않았던가.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痕迹)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자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찾기로 나아간다.
물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우매한 시도로 여기는 반론이 늘 있었다. 현대신학자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중요한 전제와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그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들이 많았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가 본 삼위일체 흔적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창조과학'운동의 원조인 헨리 모리스(H. M. Morris)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과학자다운 발상이기는 하나 너무 단순하고 불충분하며 잘못하다가는 양태론자라고 오해를 살만한 주장이다.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적 관심으로 초월의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다가 미숙한 신학적 불랙홀로 빠져들고 마는 경우가 많은 데 모리스에게서도 바로 그런 점이 보인다. 내재의 학문(과학)으로 초월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늘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자연 계시 속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 흔적)
예수는 복음서 속에서 자신의 신적 속성과 신적 사역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원성(요 1:1; 8:58; 17:5), 전지전능함(마 9:4; 16:21; 마 28:18, 20; 막 5:11-15; 눅 6:8; 7:14; 요 1:48; 2:25; 4:29; 11:38-44; 21:17; 16:30), 무소부재하심(마 18:20; 28:20; 요 1:18; 3:13)은 신적 속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그가 스스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의 원천이라고 계시한 것도 신적 속성을 증거하며 다른 인간과 달리 그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Vere Homo)인 것도 신적 속성을 가진 분임을 증거 한다(눅 4:34; 요 6:69; 8:29, 46).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도(요 5:18)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Vere Deus, 요 10:30)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17-23, 36-37, 43, 45).
예수께서 자연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거 하려한 구체적 모습은 복음서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분명 초월의 삼위일체를 자신이 창조한 내재(內在)의 자연을 통한 한계를 지닌 유비의 방식으로 증거 하려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자신이 바로 삼위일체가 아니신가. 피조물 안에 인간이 유비의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계시는 아니나 인간은 그 흔적의 부스러기를 하나둘 찾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예수와 신학자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고 일부 신학자들이 그렇게 찾고자 하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 대해 예수가 구체적 언급 없이 침묵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 계시가 지닌 유비의 이 신학적 해석의 고민과 괴리에 대해 맥그라스는 정통 교리라는 신학적 매트릭스(matrix)와 단 하나의 고립된 유비 형태의 해석이 아닌 서로 상호 관계성을 가진 이미지를 통해 과대 해석 되는 실수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고 본다.
나가면서
성경을 통해 예수의 자연 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 계시를 향한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 세기 신학을 지배하여 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 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여 자연 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 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극단적인 부정적 견해에 대해 바르트의 그 같은 비판은 (1) 바르트의 부적절한 성경적 해석에 기초하며 (2) 바르트 자신이 개혁신학의 전통에 있다는 주장이나 칼빈이 자연 신학에 대해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다고 해석하는 바르트의 견해는 모두 잘못이요 (3) 자연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20 세기 주요 신학에 있어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을 보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예수의 자연 계시를 별도로 추적한 본격적 연구가 신학의 주변에서 전혀 눈에 띠지를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대해 어떤 구도로 바라보시고 해석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 일반 계시가 어떻게 구속의 계시로 연결되는 지 추적해 보는 작업은 언젠가 개인적으로 꼭 한번쯤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었다.
자연 계시에 대한 정리는 조직 신학의 한 분야로 일부 정리된 것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나 예수 스스로 자연을 바라 본 자연 계시에 대한 언급과 예수 사역에 나타난 자연 계시적 측면을 별도로 정리하는 신학적 작업이 없었다는 점이 연구의 당위성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오랫 동안 신학이 무관심하게 방치해 온 이 같은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마치 주행의 난코스를 달리는 듯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상 전반에 대한 외면과 방치는 자연적 참사를 불러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메르스 소동이나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 교훈에서 그것을 이미 절실하게 체험하였다. 삼위의 제 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 계시(자연 계시)를 밝혀보고 구속 계시로 연결하기 위한 접촉점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예수의 자연 계시에 대한 추적은 신학적 미로이기는 해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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