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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선학원 설립자,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의 신앙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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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의 신앙과 학문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의 신앙과 학문

-변증가로서의 피어선을 중심으로-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

 

 

 

 

 

Ⅰ. 왜 아더 피어선의 변증인가

 

21세기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스트모던 상황 가운데서 반기독지성인들로부터의 세찬 도전을 받고 있다. 이들 반기독지성을 대표하는 중심인물 가운데 그 영향력에 관한한 3총사를 꼽으라면 아마도 평생 신을 부정하던 유명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1949-2011)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 30년 이상 캠브리지 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 )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 세 인물의 두드러진 특징은 모두 영국계이며 반기독인인 동시에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지성인이라는 점이다. 히친스는 무신론에 정면 도전한 책인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마더 테레사 수녀에 대한 비판서인 「자비를 팔다」(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 「헨리 키신저 재판」(The Trial of Henry Kissinger) 등의 저서를 통해 신을 정면 부정하고 있으며 이들 주장을 바탕으로 많은 토크쇼와 순회강연을 통해 복음주의자들과 ‘신의 존재’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인 인물로 유명세를 떨쳤다. 무신론자들 사이에 우상파괴자라고도 불렸던 그는 신구약 뿐 아니라 지적 설계, 악과 지옥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해왔다. 또한 신·구교 뿐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를 싸잡아 비판해온 인물이었다. 히친스 못지않은 무신론 논객인 유명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인간이 만든 존재에 불과하다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에 정면 도전하여 모든 종교인의 공적이 되어있으며, 스티븐 호킹도 최근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무신론자들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같은 선교적 위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100 여 년 전 선교사, 목회자로서 뿐 아니라 탁월한 변증가의 모습을 보였던 피어선 박사(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의 사역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10년부터 만 5년에 걸쳐 90여 편의 글을 묶어 출판한 「근본교리들」(The Fundamentals)의 집필진 가운데서도 피어선 박사는 64명의 참여 저자 중 놀랍게도 가장 많은 논문을 제출한 인물이었다. 그가 세속에 대항하여 성경과 신앙 수호에 얼마나 열심 있고 탁월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신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인 동시에 평택대 전신인 피어선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탁월한 변증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구체적으로 잘 연구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청교도 배경의 가정에서 자라 일찌감치 헬라어와 라틴어 수사학적 교육을 받고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보수주의적 신학자였다. 안명준 박사는 이런 피어선의 성경관을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굳게 선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굳게 따르는 학자였다고 논증한다. 이런 그가 어떤 식으로든 성경과 신앙의 변증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종의 기원」(1859)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고 과학이 폭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던 19 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분명 인류 역사의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이 격동의 역사적 중심을 치열한 목회자요 선교사로 살았던 피어선 박사의 변증가적 혜안을 살펴보는 것은 19세기 말과 유사한 혼동의 시대로 접어든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이 될 것이라 본다.

 

그럼 기독교 변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을 반기독교적 공격으로부터 수호하는 일이다. 성경적 변증학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권유할 때 변증학에서 터득한 변증의 방법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변증학을 선교학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 험증학’(Christian Evidence)은 기독교 변증학에서 이미 그 존재가 변증된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하시는 구속의 사역에 대해 그 진리성과 타당성을 변증하는 학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속적 사역의 증거들을 거론하는 일을 하는 학문이다. 변증학은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으로 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변증학의 범주 안에 험증학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 사실 피어선 박사는 이들 변증과 험증에 모두 능했던 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피어선 박사의 변증의 궤적을 간단히 추적해 보고자 한다.

 

 

 

Ⅱ. 변증가로서의 피어선의 학문적 배경은 어디서 왔는가?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1837년 3월 6일 뉴욕에서 10남매의 9번째 그리고 4형제 중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해는 무디와 존 워너 메이커 그리고 런던의 스펄젼이 태어난 해였다. 같은 해 태어난 이들 네 사람이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는 물론, 세계 선교사적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피어선의 출생은 그의 조상이 1639년 영국 국왕의 명령을 받아 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미국에 정착한지 약 200년이 지난 뒤였다. 피어선의 조상 중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사람은 뉴왁(New ark)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아브라함 피어선이다. 주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뉴왁(New ark)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그의 출생지인 영국의 Newark-on-the-Trent의 지명을 따왔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 피어선의 후예들은 현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피어선의 선교적 열정이나 복음적 설교의 능력이나 학문적 깊이가 한결같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적 유산 때문이었다고 후대 평가자들은 밝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네티컷 주 브랜포드(Branford)에서 피어선 목사를 따라 이사 온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 청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정주의 원칙에 입각한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교인이 아닌 사람은 투표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 피어선 목사의 아들 아브라함 피어선 2세 역시 목사였다. 그는 예일대 설립자 중의 한 명이며 초대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인 스티븐 피어선은 장로교의 장로로 열 명의 자녀들을 장로 교인으로 길렀는데 피어선은 주일이면 스프링가 장로교회의 교회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은 그가 탁월한 기독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학자적 수양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스티븐 피어선과 그의 아내 셀리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기독교 사립학교로 보냈다. 나이 11세 되던 1848년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에 등록하여 그곳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2세 때 희랍어신약성경을 읽었으며 뉴욕시 테리타운 언덕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그의 뛰어난 학문의 능력과 시, 음악, 어학, 그리고 화술 등의 재능이 나타나 부모들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대학과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을 내렸다.

 

13세에 감리교회 특별 부흥회에서 중생을 경험한 그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852년 5월 28일 머서가(街)에 있는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백인 계 무역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당시 영국인 조직인 YMCA에 관한 강의를 듣고 뉴욕 청년대표들을 포함한 백 명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53년, 피어선은 뉴욕 주 클린턴에 있는 해밀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시학, 수사학, 그리고 어학에 몰두하였고 동료 젊은 토머스 베일리 알드리히는 피어선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줌으로 피어선의 문학적 포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피어선의 고전적 시 형태는 그의 종교교육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경건으로 넘쳤다. 이런 시적 감각은 그의 저작들에 반영 되었을 뿐 아니라 변증가로서의 삶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857년 피어선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詩) 기고란 외에도 헨리 비쳐(Henry Ward Beecher)가 창간한 「표준과 독립」(The Standard and the Independent)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기고하였다.

 

피어선은 1860년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에 성경이 역사와 과학 등에 대해 잘못된 진술을 포함한다는 고등비평이 힘을 얻었고 유니온신학교의 찰스 브릭스 교수는 1880년 이후 이 새로운 신학사조를 장로교에 들여왔다. 1892년과 1893년 장로교총회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 시켰다.

 

이 후 유니온신학교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교로 바뀌었다. 현재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본산이며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에 입각한 신학교로 완전 변질 되었다. 이런 모습들을 경험하면서, 거듭난 신앙인이요 선교의 열정에 불타던 피어선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변호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1860년대 초반 피어선은 기독교에 대한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에 대한 증거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돌을 수집하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자연 과학에 흥미가 많던 피어선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 런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의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B. Von Humboldt)와 프랑스의 파스칼(B. Pascal)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이후 그는 디트로이트 YMCA에 적극 참여하면서 YMCA가 초교파적인 병기로서 청년들을 양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어선은 디트로이트 기독청년 연합회를 위한 건물과 체육관 구입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동안 임시건물에서 성경연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피어선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한 외에 장로교단 일에도 적극 참여한다. 1872년에는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1875년 피어선의 나이 서른여덟 되던 해에 미시건 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교운동에 있어 가능한 한 중립적 위치에 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1890년 이후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자신의 온건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93년 세계박람회에서 노출된 신학적 다원주의가 피어선을 놀라게 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학과 에큐메니칼적 관용 간에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애 마지막 15년간, 그는 평신도 성경연구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등비평이 주장하는 지성주의와 불경건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전(前)천년주의 성경강해자의 주역이 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성경에 굶주린 수많은 학생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진실한 근본주의자였으나 훗날 근본주의 운동을 특정 짓게 된 분파주의와 편협은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성경강해에 관한 저술 및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강화하고 국제적 성경강해자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대개가 선교에 관한 것들인데 반해, 1895년 이후 저술의 대다수는「세계선교 논평」을 제외하고는 영적생활과 성경연구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점이 선교에서 케스윅 영성운동 및 성경강해로 옮겨간 것은 선교단체들 간의 신학적 논쟁을 피하려는 방법 뿐 아니라 성경적 근본주의로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를 훗날 많은 학자들이 진정한 근본주의자라 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피어선이 조지 뮬러를 따라 후천년주의자에서 전천년주의자로 전환한 것은 주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그의 근본주의적 관심을 심화시켰을 것이라 본다.

 

변증가로서의 아더 피어선의 학문적 배경은 이 같은 그의 삶의 궤적과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결합하여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Ⅲ. 변증가로서의 피어선

 

피어선은 정통 조직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탁월한 변증가로서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변증가로서의 모습은 주로 「오류 없는 증거들」(Many Infallible Proofs: Chapters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 1886)에 나타난다. 주로 위대한 불가지론자라 불렸던 잉거솔(Robert Ingersoll)에 대한 논박으로 시작된 이 책에서 그는 증거의 중요성과 필요성 그리고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피어선의 이런 변증가로서의 모습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피어선은 특수 계시로서의 예언(prophecy)을 수용한 변증가였다

 

피어선은 기독교의 증거가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로부터 온다고 했다. 내적 증거에는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과 가르치는 교리와 도덕성을 내포하였다. 피어선은 예언과 기적에 대해 주목한다. 피어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외적증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예언과 기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언은 말로 표현되는 기적을 말한다. 따라서 예언과 섭리는 쌍둥이 자매이다. 피어선은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기적을 반대하는 것에 맞서 자연신론을 강하게 거부한다. 피어선이 볼 때 기적의 반대는 곧 예언의 반대였다. 성경은 기적의 책이 아닌가. 기적이 부정되면 예언이 부정되는 것이요 기독교가 부정된다. 이것이 그가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는 진정한 참 된 예언의 기준으로 3 가지를 꼽았다. 첫째, 인간적 예견이나 지혜나 총명으로 추측할 수 없는 미래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둘째는 참된 예언이라면 결코‘만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 된 예언은 예언의 시간적, 종합적 증거가 완벽하게 일치해야 한다. 피어선은 이것은 마치 증거의 시냇물이 강과 합쳐지고 거대한 홍수를 이루듯 거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인의 흩어짐을 예수님 당시 누가 과연 담대하고 명료하게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이 하나만 보더라도 성경은 범상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권위는 하나의 예언이 모든 예언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관점은 코넬리우스 반 틸의 ‘전제에 의한 이론’(the reasoning by presupposition)과도 유사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지식이 있음을 웅변적으로 알려준다.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해야 한다. 성경 예언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우 이신론자에 머물게 된다. 성경은 우리가 기독교를 변증할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다같이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에 호소하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법칙’을 진정으로 ‘사실’과 ‘법칙’이 되게 하는 궁극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따져 변론하게 하는 표준이 된다. 이렇게 성경은 “규범을 주는 규범”(Norma Normans)인 것이다.

 

 

2. 피어선은 성경의 기적을 의심하지 않은 변증가였다

 

기적(奇蹟)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신약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와 ‘표적’ 세 용어는 경우에 따라서 함께 쓰일 때도 있는 데(행 2:22; 살후 2:9; 히 2:4) 이 용어들은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다. 즉 구원적 신론에서 이적은 필연적 귀결이다. 창조, 섭리, 죄, 구원의 원리를 인정할 때 구원은 진실한 필요물, 즉 은총으로서의 이적이 된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양하다.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의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은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자 구프린스턴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피어선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본 흄(D. Hume)이나 스트라우스(Strauss)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적으로서 기적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기적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은 기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태양이나 무지개를 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힘 모두를 초월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기적이라 인정한다. 정해진 자연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작용을 경이롭다고 하나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헨리 모리스는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이 성경 창조의 기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당연히 성경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확고한 창조 신앙의 피어선이 살아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 것은 당연하였다. 피어선은 변증에 있어 과학과 기적 둘 다 당연히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3. 피어선은 성경 자증의 원리(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를 사용한 변증가였다

 

피어선에게 있어 성경은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피어선이 볼 때 교리나 실천 상의 오류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시험해보면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의 핵심 도구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서 한 본문이 다른 본문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게 하던가, 다른 본문의 올바른 느낌을 확증해 주든가, 새로운 각도에서 그 의미를 조명해 주고 그 깊이를 열어 주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이 같은 피어선의 입장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의 모토로 시작된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어선에게 있어 성경적 변증은 불신자와 신자 사이의 단순한 '공통적 관념'(롬 1:20)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데서 말미암는 차원의 '공통적 관념'(요 1:1-12)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변증학도 당연히 신학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원리, 즉 성경 자증의 원리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유추적 체계의 원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4. 피어선은 성경과 과학 모두가 변증에 유용함을 인정한 변증가였다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이 말을 지금부터 110여년 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즉 과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적이며 실제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또한 오늘날 과학은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떠나 높이 평가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이든 과학적인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서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성경은 창조의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더욱이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bereshith)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피어선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피어선은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어선은 과학에도 대단히 해박한 학자였다. 피어선이 활동하던 시기는 진화론과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관심은 당대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당대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피어선의 관심 영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어선이 과학적 변증서를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어선은 자신의 책에서 자연과 성경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는 주장 뿐 아니라 오늘날 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주장을 편다. 피어선은 또한 창세기의 날(yom)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었다고 논증한다. 피어선이 볼 때에 창세기 2:4절에서 이 말은 창조의 전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시 95: 8절에 보면 “시험하는 때에” 란 말씀에서 그 날(‘yom’)은 40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피어선은 이 “날”은 하나의 시기를 의미했을 것이며 히브리어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의미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이 주장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결론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피어선이 볼 때에 성서의 목적은 과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었다. 성경이 목적하는 것은 분명 도덕적이며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언어가 과학적이었다면 그 언어는 관심을 끌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약점과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고 피어선은 역설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피어선은 과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자연의 영역 안에서 진화가 물리적 세계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 일 수 있다는 추측을 허용하고 있음도 주목되는 언급이라고 본다.

 

 

 

5. 피어선은 성경 속에서 진정한 도덕적 권위를 찾은 변증가였다

 

세상 철학에 있어 인간의 최고선은 자아실현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로서 우주의 법칙에 순응해서 그의 내적 가능성을 계발한다. 기독교 철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상 안에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해야 하며 악한 자의 사역이 계속하는 한 절대적 최고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도적적 양심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 늘 무능할 뿐이다. 피어선이 볼 때 성경적 최고선은 개개인의 악과 내재적 악을 소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윤리는 소망의 윤리요 회복의 윤리이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책이 아니다. 성서의 통일성, 명확성 가운데 내재하는 도덕적 숭고함의 극치(sublimity)는 다른 종교와 차원 자체가 다르다. 피어선은 성서를 대적하는 것이 곧 도덕적 타락이라고 말한다. 피어선은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공격하게 내버려두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전능하나 선하시며 모든 것을 알지만 자비로운 분이다. 세상 헬라의 처럼 신경질적이고 자기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다. 이게 인간의 본 모습이다. 인간을 닮은 신이 아닌 신을 닮은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성서만이 인간의 존엄과 위엄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한다. 동물과 사람의 위치는 분명 다르다. 송아지를 숭배하고 악어를 숭배하는 것은 추락한 인간의 상징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동물의 창조를 고귀하게 여기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모든 피조물의 왕관이 주어졌다, 자연철학, 천문학, 지질학, 소설, 역사, 법과 의학은 지식은 주나 육욕을 억제하고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며 고상한 목적을 고취하고 죄의 기질을 드러내며 더 진실한 아들이 되게 만들고 더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성경의 도덕적 권위는 성경이 다른 종교 문헌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을 증거한다. 피어선은 이점을 강조한다, ‘사람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의를 위하여 역사하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며 악은 억제 되며 선(善)을 자극’한다.

 

 

6. 피어선의 변증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이었다

 

피어선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피어선은 총 6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변증한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요, 둘째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독특하고 신비로운 측면을 다루고 셋째 신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역사적 실재로 나타날 수 있었는가를 다루면서 이 당혹스러운 주제에 대해 변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2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능력과 독창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구속사적 설교에서 잘 나타나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direct prophecy)이 소위 ‘원복음’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3장 15절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예언자의 시대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에게서 절정을 이루며 말라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논증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과 역량이 풍부했던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보다 오히려 간접적 예언(indirect prophecy)들이 보다더 놀라운 증거들이라고 본다. 예언적 시(詩)들과 모형론적 레위기의 의식과 규정들 그리고 역사책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형을 추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의 파라독스에서도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역설 가운데 바로 십자가에서 그 적나라한 절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니케아공의회 이후에 지속되고 있는 신학의 관심 영역이다. 제한된 우리 인간이 어찌 전지전능하신 참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피어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긍정하는 피어선은 이 문제를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은 선생(랍비)으로 묘사한다. 우리 인간은 믿음 뿐 아니라 배워야 한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불렀다. 피어선은 워드워즈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는 사유의 화신(Language is the Incarnation of thought)"이라고 했다.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위와 거룩함과 고상함과 생명력과 독창성과 희생의 사랑은 세상 철학과 다른 참 진리요 참 철학이다. 과연 이 세상 누가 이분과 견줄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은 아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위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더 피어선은 피어선신학교(현 평택대)의 설립자였다

 

Ⅳ. 나가면서

 

지금까지 변증가로서의 피어선의 생애와 학문적 여정과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피어선의 변증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그는 단순한 성령의 사람이 아니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변증가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더하여 신학, 문학, 예술, 철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독교와 성경과 그리스도를 증거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피어선이 살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은 성경과 기독교가 세상의 세속적 자연주의와 우연주의로부터 세찬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그가 이에 전혀 굴하지 않고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앙의 변증에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는 설득력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작금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 피어선의 증거들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변증이었다. 기독 학자로서 피어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그의 변증은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에서 나온 확신에 찬 지성과 열정의 강력한 변호였다. 이것은 그가 성경을 신뢰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철저한 ‘믿음’, 그것이 바로 그의 설득의 힘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의 변증이었다. 피어선의 변증은 단순히 성경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어선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는 변증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믿음에 대해 피어선기념연구원 원장을 지낸 유윤종 박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확신은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길만한 믿음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피어선은 열정의 선교사답게 이렇게 21세기 첨단과학기술시대를 사는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려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것인지 이미 100여 년 전 그 길을 변증의 방법으로도 비춰준 신앙의 위대한 등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