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세상의 중심에 등장하다
영원한 민족적 라이벌 그리스(야완)와 터키
같은 야벳의 아들 고멜과 야완의 후손인 그리스와 터키는 오늘날 한일 관계처럼 여러 모로 정치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 문제로 우리 민족의 감정과 신경을 자주 건드리는 것처럼 야완 후손 깃딤(Kittim)의 섬 키프로스는 바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긴장관계에 있는 섬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실은 혈통적으로 그리 먼 사이가 아니다. 특히 터키의 이오니아 지방과 지금의 그리스는 같은 야완의 땅이었다.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케말 파샤(아타 튀르크)의 고향도 그리스(데살로니키)였다.
마치 일본과 우리 민족이 사사건건 늘 팽팽한 긴장과 라이벌 관계이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실은 혈통적으로는 두 나라가 가장 가까운 민족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마치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이스라엘과 아랍처럼 가까운 사이가 자주 충돌하고 갈등을 벌인다.
신앙적으로 우리 민족은 애증(愛憎)의 관계인 일본을 전도해야 할 신앙적 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화 되어버린 터키의 영적 변화는 언젠가 그리스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성경 속 계시된 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
성경에 이 민족은 다시 등장한다. 바로 헬라 왕의 모습으로다. 징기스칸, 나폴레옹과 견줄 수 있는 또 한명의 유명한 역사상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더 3세)이 바로 그 사람이다. 야완(헬라)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은 같은 야벳의 후손인 마대(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가져 왔다. 마게도니아 왕 빌립 2세와 에피루스(Epirus) 여인 올림피아(Olympias) 사이에 태어나 헬라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었던 알렉산더(B.C. 356-323)는 헬라 문화야 말로 천하 대통일 제국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주전 333년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진군한 그는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다. 이후 그는 팔레스틴 땅으로 들어온다. 두로와 가사가 완고하게 저항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시리아와 팔레스틴 남부를 점령하고 애굽까지 진격한다. 대제사장 얏두아(Jaddua) 시대에 헬라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이 적중(단 8장)한 것이다. 이후 애굽에서 팔레스틴을 거쳐 다시 바벨론, 페르시아로 들어간 알렉산더는 박트리아(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우즈벡, 카자흐스탄 지역을 통치한 국가)를 진압하고 인더스계곡으로 달려가 지금의 인도 펀잡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과거 헬라,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땅뿐 아니라 지중해, 에게해, 흑해, 카스피해, 인도양, 페르시아만, 홍해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야벳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대로 였다.
알렉산더 대왕과 유대인
지금의 중동 지방 전역을 유린한 알렉산더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 유대 민족은 어떻게 대우하였을까? 놀랍게도 알렉산더는 유대 땅의 이전 다른 정복자와는 조금 다르게 이스라엘 민족을 다룬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 고유의 율법을 보호하였으며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런 배경에 대해 알렉산더의 꿈에 나타나 그의 승리를 약속한 하나님의 경고로 인함이라 기록(Antiq. Ⅺ. 314)하고 있으나 역사적 신빙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알렉산더는 애굽에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를 건설할 때에도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장려 정책을 폈다. 훗날 70인 역 성경이 애굽 땅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이렇게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한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이들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는 무려 70개 이상이나 되었다. 알렉산더는 팔레스틴 지방뿐 아니라 애굽에서도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애굽을 자유케 한 해방자로 보였기에 환영을 받았다. 가라(가야, 카라)의 지명이 지금의 터키와 흑해 주변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온 것도 지명에 대한 인류의 지극한 애착 때문이다. 오죽하면 열도인들은 과거 쓰시마 섬을 “가라지마”라 했고 한국을 “가라구니”라 했겠는가. 심지어 일본 고서(古書)는 일본 열도에 벼농사를 보급 시킨 족속도 우리와 독도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시마네(島根)현 이즈모(出雲)국의 가라야마님(鞍山祗)의 부족이라 했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던 알렉산더
알렉산더가 정복한 것은 땅만이 아니다. 그는 정복한 북동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 엄청난 헬라 문화를 뿌려놓게 된다. 헬라식 웅장한 건물, 체육관, 야외극장들이 건설되었고, 의복과 생활 방식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상인 계급과 중산층이 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활발한 유형적, 무형적 교류 가운데 언어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헬라어는 국제어가 되었고 다양한 타 민족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가운데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갈 4:4). 그리고 헬라어는 신약 성경의 언어가 되었다. 알렉산더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던 것이다.
이런 격동기를 거치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처 하였을까? 알렉산더 시대는 유대인들에게 도전과 응전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보내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시련과 고난과 유혹이 교차하였다. 헬라식 문명과 문화에 대한 압박과 동경은 문화적 동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곧 신앙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반면 이 같은 헬레니즘문화의 영적 위험성을 직감한 일부 유대인들의 헬라 문화에 대한 종교적 저항은 더 깊은 신실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그들은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신앙적 안간힘을 다했을 것이다. 이 기간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 민족에게는 신앙적 연단의 시절이었다. 하나님은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유대 민족 신앙을 세계 신앙으로 바꿀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세계사적 흐름 가운데 이렇게 헬라는 그리스도가 오실 준비를 위한 배경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신앙적 도전과 연단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은 바벨론에서 33세에 요절하고 만다. 이것도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였다. 그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표범(단 7:6) 같은 인물이요 수염소(단 8:5,21) 같은 인물이었다. 외경 마카비 1서(1:1-8)에도 그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대제국은 그의 수하 4장군이 분할 통치를 하며 흐름을 이어갔다. 그렇게 세상은 300여년 후 인류의 구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은 또 한 번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짐)를 가져왔고 놀랍게도 이러한 분산은 후에 헬라어에 능통하고 다중 언어에 능했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마치 일제 치하 36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우리 민족의 유랑이 20세기 후반 들어 일본, 중국, 원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의 복음 전파에 강력한 배경이 된 것과 많이 닮아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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