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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신앙/창조와 신학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가 제시해야 할 창조론적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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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가 제시해야 할 창조론적 윤리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는 과학에 대해 어떤 기본적 윤리 체계를 가져야 할까?

 

윤리란 좁게 보면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 또는 그러한 도리를 찾는 학문입니다. 크게 보면 가치 물음 가운데 하나가 윤리입니다. 사람이 바라는 가치는 실용 가치와 심미 가치 그리고 도덕 가치로 나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가치 추구 과정에서 반드시 윤리의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실용적이며 심미적이며 도덕적 요소를 지니므로 실용 가치든 심미 가치든 도덕 가치든 이들 세 가지 가치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속 과학의 세계는 원리와 법칙과 실용을 쫓다보면 가치의 문제가 불거지고 반드시 윤리적 문제와도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속 과학은 위험한 연구를 무조건 통제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으며 막을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지요.

 

그래서 차선책으로 현대 과학 윤리는 연구가 눈덩이 처럼 커져서 엄청난 모멘텀(momentom)을 가지기 전에 그 초기 단계에서 가능한 미래의 위험이나 부작용을 걸러내기 위해 사전 경고를 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인류 가치’( Modern Science and Human Values)에 대한 논의에서 (1)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2)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 중립적(value free)이지 못하며 (3)새로운 지식이 나타날 때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며 (4)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 의존적이며 (5)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6)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이들 여섯 가지 명제를 정리하였습니다.

 

로런스는 현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잘 간파하고 잇습니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됩니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이 당연히 대두 되는 데, 종교든 윤리든 그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레스닉(David Resnik)은 자신의 12 가지 과학 윤리 강령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사회적 결과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그 결과를 알리고 이 결과가 해롭다고 판단될 때에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하였습니다. 세속 윤리학자나 과학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과학의 윤리 문제는 가치 중립(value free)적일 수 없음을 분명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떠할까요? 기독교의 경우 그 정의가 기독교 종교 행위로 나타나고 그것은 성서의 윤리 사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과학과 윤리는 삼두 마차처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진리보다 도덕적,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시대의 윤리적 특징으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현대 과학과 관련된 많은 윤리적 이슈들을 발생시키는 것이지요. 복음주의 신앙은 포스트모던적일 수는 없으므로 우연론적 윤리가 아닌 창조 신앙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윤리적 체계와 기준을 세울 수 있겠습니다.

 

 

첫째, 윤리 체계의 기준이 있는가(윤리의 기준점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

 

우연론적 진화론적 윤리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을 전제하고 윤리를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윤리임을 표방하는 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윤리적 체계의 시작을 창조주 하나님께 둡니다. 세속 윤리가 우연과 우연론적 진화에 뿌리를 둔 반면 창조 윤리는 뿌리와 기준을 가지는 데, 창조론적 윤리는 바로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윤리 체계의 근원으로 봅니다.

 

 

둘째, 자연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창조론의 윤리는 모든 피조 세계에는 창조주의 선한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우연론적,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본래 선하다는데서 출발합니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의 틀을 제공합니다. 특별히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양육강식의 투쟁과 적자생존은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연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우연히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윤리관은 기독교적 윤리 체계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통에 대해 깊이 연구한 손봉호 박사는 과잉 쾌락은 불필요한 고통을 요구하고 그 고통이 반드시 그 쾌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과소비가 환경을 오염 시키게 되면 누군가가 그 때문에 병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절제는 자원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기본입니다. 여기서 조그마한 절제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의롭게 바꿀 수 있음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적자 생존, 약육 강식의 우연론적 진화 윤리학에서는 과잉 쾌락이 가져다주는 불필요한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자원해서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절제의 미학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셋째 윤리는 발달(진화)되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다

 

우연론,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소개됩니다(시 19:1-6).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인 것이지요. 우연론자들이나 진화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무신론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게 맡겨진 인류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당연히 있을 수 없겠지요.

 

 

넷째 창조론의 윤리는 회복에 중점을 둔다

 

우연과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필요로하는 역동적 윤리를 스스로 채택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의 윤리는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둡니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입니다.

 

즉 그 절대적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둡니다. 창조론적 윤리는 그 회복된 양심의 기준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찾습니다(요 1:14).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기술을 지구에서 인간과 환경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성서 전통이 모든 창조물들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 관심을 갖는 윤리에 크게 공헌할 수 있는 참 윤리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거대 담론이 많이 훼손된 포스트모던시대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중요하나,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르는 윤리적 가치를 묻는 것은 더욱 중요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 박사(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