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창조론 운동을 위한 모색(강의 자료 5-2조덕영 교수)
영역: 신학, 과학사/과학철학
키워드: 복음주의, 창조론 운동, 창조과학, 헨리 모리스
복음주의 창조론 운동을 위한 모색
The Evangelical Modern Creation Movement
조덕영
Duk Young Cho
창조신학연구소
Korea Institute for Creation Theology
Seoul, Korea
EMail: dycho21c@hanmail.net
(Received January 5, 2011,
Accepted January 21, 2011)
[Abstract] This paper deals with The Modern Creation Movement. One of the most influential modern creation scientists was Henry M. Morris, a Southern Baptist who holds a doctorate in hydraulic engineering from the University of Minnesota. As the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Creation Research Society, and later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He is one of the chief theoreticians behind the modern conservative short-age creation-science movement. The Korean Association of Creation Research was first organized in Seoul in January 1980 with H. Morris and Dr. Gish for counsel and assistanc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ttempt an evangelical consideration of modern creation movement.
Ⅰ. 창조론 운동의 등장
Ⅱ. 헨리 모리스의 역할
Ⅲ. 창조과학 운동의 특징
Ⅳ. 한국에서의 창조론 운동
Ⅴ. 복음주의 창조론 운동을 위하여
Ⅵ. 나가면서
Ⅰ. 창조론 운동의 등장
창조론(Creationism)은 모든 자연 현상이 지성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는 규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창조론 운동은 주로 창조과학자라고 불리는 일련의 과학자들이 주도하여 시작된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창조과학 운동(Creation Science Movement)은 근본주의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관심을 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뿌리를 둔 운동이라는 점에서 복음적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오늘날 그 의미가 축소되어 우주와 생명의 창조에 대한 창조의 연대를 극히 젊게 보고 지질학적 전세계적인 홍수(창세기 대홍수)를 믿는 견해로 바뀌어 있다.
이와 같은 창조론 운동은 19세기 보수적인 개신교나 20세기 초 근본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근본주의자들은 창조론에 관한 결론들에 있어 그리 성급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전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창세기 1장의 “날”이 지질학적 발전의 오랜 시대를 나타낸다고 믿거나, 세상의 첫 창조와 그 이후의 일련의 창조 행동 사이에 긴 공백이 있어서 그때에 화석이 형성되었다고 믿었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을 거치면서 성경이 단순히 정확무오한 과학교과서 같은 책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향해 눈높이를 낮추어 적응된 수사학적 책이라는 것에 대해 복음적 학자들은 그리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진화론이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모든 학문 영역으로 뻗어가면서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25년 미 테네시주에서 있었던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으로 널리 알려진 법률 검사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은 진화론의 반대편에 선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진화론을 대중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도 지구가 태고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후원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예리함을 갖고 있던 브라이언은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과학적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다윈주의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런데 사회적 다윈주의는 그 정당성을 과학적 진화론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창조론은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노력이 크다. 그들은 예수 재림교의 창시자인 엘렌 화이트의 거룩한 문서들이 지구의 역사 연구의 기본 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공헌을 했던 인물은 장로교 목사였던 해리 림머(Harry Rimmer, 1890-1952)와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이론가인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였다. 프라이스는 지질학을 연구하면서 1923년에 절정에 달했던 창조론의 몇몇 결과물을 ⌜새로운 지질학⌟ 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단순한” 혹은“문자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000-8,000년 전에 창조하였고 지구의 지질학적 과거를 형성하기 위해 대홍수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라이스는 이전에 훈련이나 현장 경험이 전혀 없었던 독학의 지질학자였다. 그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태고의 지구를 알려 주는 지질학적 단충과 분명한 증거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문제 삼기 위해, 자연의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실증해 주었다. 전문 지질학자들은 프라이스의 생각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프라이스의 생각은 재림교의 모임 밖에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루터 교회의 미주리 회의였다. 이들은 제 7일 예수 재림교의 교리를 긍정하지는 않았으나 프라이스의 성서적 문자주의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이후 몇몇 창조론 단체들이 결성되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초기 창조론의 문헌들은 외부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장로교 사역자인 해리 림머와 같은 몇몇 근본주의자들이 홍수에 관해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지만, 림머의 영향력도 그가 사망하면서 크게 경감되었다. 이런 배경 가운데 헨리 모리스가 등장한다.
II. 헨리 모리스의 역할
오늘날 창조과학 운동에 있어 헨리 모리스(Henry Madison Morris)가 차지하는 상징성은 대단히 크다. 모리스는 자신이 창조론에 눈을 뜨는 데에는 프라이스의 공헌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리스는 자신이 침례교도로서 프라이스가 믿는 안식교(SDA)의 교리는 분명 수용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모리스 개인의 이름이 창조론의 표면에 등장하기 전, 먼저 대학에서 훈련받은 보수적 복음주의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군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1941년에 미국과학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을 결성하였다. 창조론의 홍수 지질학자들은 이 단체가 자신들의 결론을 수용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해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고수하며 자연 세계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과거의 날-시대 이론 혹은 갭 이론(gap theory)의 편에 선 사람들이었다. 비록 ASA가 창조에 대해 명확한 공식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초기에는 엄격한 창조론자들에게 흡족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 중에, 창세기 안에 있는 거룩한 계시와 실증적 연구를 통해 주어지는 자연 계시가 19세기 초반 이후에 계속 시도되었다가 개정되고, 다시 시도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ASA 안에서 이러한 질문들의 대한 내적 논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ASA가 유능한 과학자들의 건실한 산실로서 유지되었고, 논쟁적인 과학적 문제에 대해 탁월한 자료들을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상투적인 태도-즉 근본주의적 의제에 매달리는 상투적인 태도-로 인해 좀더 폭 넓은 과학 세계에는 제한적인 영향만 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 운동이 ASA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단히 부정적인 편이다. 즉 ASA를 창조과학의 편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얼마나 근본주의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보기이다.
창조과학이 ASA와 대화하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1950년대 후반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은혜 형제 교단(Grace Brethrens)에 속한 인디애나 그레이스 신학교(Grace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자인 존 휘트콤(John C. Whitcomb, Jr.)과 남 침례교단 배경의 수력 공학자인 헨리 모리스가 결합한 것이다. 두 사람은 프라이스를 뛰어넘어 새로운 기독교 창조론 운동을 위한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 무렵 복음주의적인 침례교 조직신학자 버나드 램(Bernard Ramm, 1912-1992)은 1954년 <과학과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간하였다. 부분 홍수론자인 램은 그 책에서 자연의 증거와 성경의 이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좀 더 유연한 접근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에 ASA 구성원들 대부분 이 책에 호응하였다. 예를 들어, 램은 “지나친 교조주의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조화에 방법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의 언어와 그 언어에 수반된 문화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어졌다는 명제가 진실이라고 믿는다.”는 말로 근본주의자들이 적절한 문화적 상황 안에서 성경을 읽지 못하고 19세기 베이컨 시대의 본문인 것처럼 읽고 있다고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했다. 램은 프라이스와 해리 림머의 주장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반대로 버나드 램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던 휘트콤과 모리스는 1961년, 모리스를 일약 창조론의 중심에 서게 만든 <창세기의 대홍수>(Genesis Flood) 출간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프라이스 저작의 현대판이기는 하지만, 휘트콤의 신학적 기여와 모리스의 과학적 전문 지식을 통해 프라이스의 논점을 좀더 설득력 있게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현대 지질학의 동일과정설(同一過程說, uniformitarianism)의 입장을 창조론적 관점에서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었다. 이 책에 대한 평판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잘 마른 나뭇잎에 성냥불을 던져 넣은 것과 같았다. 엄청난 주문량이 쏟아졌으며, 수백 만의 다른 책과 논문, 소책자, 그리고 주일 학교 강의를 통해 창조론의 관점이 대중화되었다. 창조론은 곧 영국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전까지 영국에서는 보수적인 반진화론자(antievolutionist)들도 지구의 형성 연대가 오래지 않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본 적이 없었다. 이후로 모리스는 한평생 수 십 권의 창조론 도서를 쏟아내며 창조과학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창조론의 자료들은 이슬람교의 교육을 위해 터키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어떤 창조론자들은 기독교 중심의 “성경적 창조론”에서 탈피하여, 공공 교육 기관에서 “창조 과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대중적인 요구를 호소하는 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창조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연구 기관들이 설립되었고, 열정적인 평론가들은 공식적인 공개 토론에서 진화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창조론을 옹호했다. 대학에서 훈련받은 지질학자들 중에서도 점차 창조론의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중에 법정에서 뒤집어지기는 했지만, 알칸사스와 루이지애나의 입법자들은 창조 과학을 진화론의 대안 이론으로 가르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미 대통령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창조 과학을 가르치는 시간을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고 공립학교에 요청했다. 이에 상처 입은 기존 과학의 옹호자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가르쳐서는 안 되는지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마을과 도시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1960년 이후 창조론은 미국의 공공생활에서 낙태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욱 격렬한 문화적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이 논쟁에 뛰어 들었다. 1967년 과학자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왈드(George Wald) 박사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과학적인 사실로 널리 인정되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단지 또 다른 오직 하나의 대안인 창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를 피해가려는 이론은 진화론을 천체로 옮겨 놓기도 하였다. DNA의 2중 나선 구조를 밝힘으로서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크릭(F. Crick)은 생명체는 지구에서 직접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먼 옛날 언젠가 지구 밖 외계에서 유입(directed panspermia)을 주장하였다.
1980년, 한국의 창조과학회가 설립되는 데에도 모리스는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모리스의 저서들은 도서출판 생명의 말씀사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하면서도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다. 창조과학 운동과 그 논쟁에 있어 모리스의 영향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III. 창조과학 운동의 특징
복음주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과학도 피조물의 한 부분이다(골 1:16-17). 그러므로 성서 해석에 있어 과학과 기독교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적 창조 과학운동이 갑작스럽게 등장하고 부각된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론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공적 세력으로 분출되었던 첫 번째 원인은 창조론이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을 구체화한 것이라는 복음주의자들의 직관적 신앙 때문이었다. 헨리 모리스와 존 휘트콤의 책은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은 순수 복음적이라 할 수 있는가? 과학적 창조론이라고도 불리는 헨리 모리스의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은 대단히 전투적이다. 그러므로 종종 개신교 식의 교회 권위주의로 불려진다. 오늘날 과학적 창조론의 조상은 분명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는 로마 카톨릭이 교회의 권위에 호소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성서의 권위에 호소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진리와 과학적 주장이 상충될 때는, 단호하게 과학적 이론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때로 창조과학의 이런 부분은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God of the Gaps) 비판에 직면한다. 즉 이것이 화성의 인면(人面)상 소동이나 영국의 스톤헨지, 미스터리 서클 등을 외계인의 활동으로 돌리는 '틈새를 메우는 외계인(alien-of-the-gaps)' 논증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튼 같은 창조론 운동 영역 가운데서도 창조과학은 선험적인 종교적 헌신을 가지나 지적 설계 운동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지적 설계는 창조과학보다 훨씬 종교적으로 너그러운 풀(pool)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대단히 근본주의 경향이 강한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지적 설계 논쟁에 우호적 관심을 갖는 것은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창조과학 즉 과학적 창조론의 이론은 주로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을 설립을 주도한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Duane T. Gish)로부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그 신학적 신념의 목록 속에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시킨다. 이 내용은 미 대법원이 참고했던 맥리안 대 아칸소교육위원회 소송 사건(Mclean v. Arkansas Board of Education)의 지방법원에서 창조론 측의 공식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가 되었다. 둘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셋째, 현존하는 종들은 고정(fixity of kinds)되어 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대진화, Macroevolution)은 불가능하다. 넷째, 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은 다르다. 다섯째, 지질학적 형성은 대격변(catastrophy, 즉 Genesis Flood)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와 우주의 창조는 젊다. 즉 6000년 내지 1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 즉 창조과학의 핵심은 지구와 우주의 오래된 나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부정한다. 지구와 생명체들이 6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24 시간이 하루일 때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주로 고수한다. 창조 역사는 단 한번 이었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적 메카니즘 안에서 이것을 검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치명적 난점이 발생한다.
문제는 이것을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고민이 생긴다. 앞에서 지적했듯 헨리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침례교 계통의 복음주의 신학자 버나드 램의 책 ⌜과학과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반박하기 위한 시도로부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진영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미국 미시간주에 소재한 칼빈대의 복음주의 지질학자 데이비스 영(Davis A. Young)은 대부분의 창조과학자들은 성서가 지구는 젊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같은 주장을 열정적으로 믿고 발전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는 젊은 지구에 대한 주장은 틀렸으며 창조주의자들은 지구의 젊은 나이를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 소위 이들의 과학적 증거들은 불완전한 정보, 희망적 사고, 실제 지질학적 상황의 무시, 그들이 원하는 가정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선택적인 자료의 이용, 그리고 잘못된 추론 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문제는 과학적 증거는 전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증거들은 지구의 나이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비스가 볼 때 헨리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맞지 않는다. 데이비스는 한 때 잠시 ⌜창세기 대홍수⌟의 주장에 호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9년 모리스가 창조과학협회(CRS)에 자신을 초청하였을 때 자신의 입장이 모리스와 달라졌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창조과학은 진화론적 과정들이 기계적으로 따라서 자연주의적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연적인 과정들 사이에 이원론적 쐐기를 박는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핵심 증거는 화석 유물이다. 이 유물에는 많은 공백 기간이 있기 때문에 진화는 완전히 자연주의적 메카니즘으로 간주된다. 진화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과학적 근거가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잘못하면 심각한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한 현상이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견해를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잘못하면 우리를 19세기의 자연신학 시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창조과학 운동이 신앙적 운동임에도 보다 자연신학적인 지적 설계 운동에 우호적인 것은 이런 이원론적 사고의 영향이 크다. 특별히 미국 창조과학 운동보다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보다 더 지적 설계에 우호적인 것은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와 미숙의 경향으로 보인다. 이 견해에 대한 당연한 결과는 하나님은 오직 초자연적인 수단으로만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들은 처음 지구상에 나타날 때 완전히 발달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이는 창조의 의미에 대한 매우 부적절한 견해이다. 다만 우리는 대진화(Macro-evolution)와 소진화(micro-evolution)를 구별할 필요성이 생긴다. 성경은 종간(種間) 변이(macro-evolution)는 부정하는 듯하고 종 내(內)의 변이(micro-evolution)는 허용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창조과학 운동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나온 건설적 비평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데이비스 영은 “창조주의의 가짜 논의들이 그렇게 많은 책, 논설, 잡지 등에 계속 반복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창조론자들은 그들이 비교적 잘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비평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창조과학 운동은 비판을 정중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유능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의 주장들에 대한 비판에서 덕을 보려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같은 주장이 책마다, 논설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앞에 놓여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오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 안에 창조과학의 전투적 특징에 대해 현실적 비평론자들과 반대론자들이 있다는 것은 기원 논쟁 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님을 보여준다. 창조과학이든 그 반대편의 복음주의 과학자들이든 성경이 결코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슈(adiaphora)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무조건 성경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좀 더 신중해질 필요성이 있다. 즉 이것은 적응(accommodation)의 문제이다. 서두르지 말고 겸손하게 성경이 말하는 명료한 입장이 무엇인지 점진적으로 찾아갈 필요가 있다.
Ⅳ. 한국에서의 창조론 운동
지난 1980년에 있었던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기간 중 한 분과(分科)로서 ‘창조냐 진화냐’란 주제의 세미나(8.12 ~8.15)가 4일간에 걸쳐 서울 정동에 있는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CCC)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강사는 미국창조연구소(ICR)의 소장 헨리 모리스와 택스톤(Thaxton), 월터 브래들리(Walter Bradley), 듀안 기쉬, 그리고 당시 KAIST 재료공학과 교수였던 김영길 박사였고,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통역 강사로 봉사하였다.
이 세미나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학생, 일반인, 교역자, 과학자 등 연 4천 여 명이 참석하는 경이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일반인들이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당시 국내 강사로는 유일하게 참석하였던 김영길 박사(한국창조과학회 초대 회장 및 현 명예 회장)를 중심으로 외국 강사의 통역을 맡았던 국내 학자 등 크리스챤 과학자 25명은 간담회를 갖고 국내에서의 창조과학회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때 참여한 외국 인사가 주로 미국 ICR의 핵심 멤버라는 데에서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도 시작부터 미국의 창조과학 운동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상황의 특성상 창조 과학 운동은 한국적 풍토에서 아주 큰 반향과 강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적 신학적 흐름에 무지한 과학도들이 중심이 된 이 운동은 미국보다도 더욱 전투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에서의 창조과학 운동도 여전히 미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게 된 것이다.
Ⅴ. 복음주의와 창조론 운동
루터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복음주의는 오늘날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포괄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미국 복음주의 기관지로 간주되는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고 또 조지 갤럽은 30%라고 말한다. 침례교 계통의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이런 복음주의 안의 갈등을 상세히 잘 서술한 학자이다. 그 갈등 가운데는 성경과 과학에 대한 견해차가 포함되어 있다. 블러쉬(D. G. Bloesch)는 먼저 복음주의를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구별한다. 둘째는 이단적인 것에 반하여 정통적인 것, 셋째는 현재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하여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탐구보다는 생활과 체험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키고 영어권 나라에서는 침체된 교회 활동에 대해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즉 복음주의는 일련의 역사적 물결 또는 동심원을 통하여 발생하여 일정한 색깔과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개혁과 청교도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와 그에 대한 대안과 반발로 태어난 신복음주의 등이 그것들을 대표한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에 따르면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그것을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회복을 주창했던 가톨릭 저술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특히 1520년에 이르러 불어 에방겔리끄(évangélique)와 독일어 에판겔리쉬(evangelisch)는 종교개혁 초기 논쟁적 작품에서 크게 부각되었고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복음적 태도와 그것을 중시하는 영적 운동이 이태리 귀족사회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의 주요 원천으로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그리고 경건주의를 든다. 그래서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의 복음주의는 반카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종교 개혁 시대의 주요한 과학적 논점을 다룬다. 청교도 시대의 복음주의적 과학관의 흐름도 살펴본다. 종교 개혁 신앙의 표어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는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데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을 다루는 데도 표준이 될 수 있다. 즉 종교 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었다. 복음주의는 종교 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여러 고백서에서 확대되고 명료케 되며 더욱 분명하게 정의되었으며 그 결과로서 16세기 이후 복음주의자를 특징짓는 잣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종교 개혁 신앙과 닿아있는 것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화, 교리화 되기 시작했다. 특히 루터교 정통주의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경건주의는 17세기 독일 루터교회 안에서 일기 시작한 신앙운동으로 이 운동을 주창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는 루터 교회가 안고 있는 경직성을 탈피하기 위해 6개조 신앙 개혁안을 담은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1675)을 발행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한 이 6가지 제안에서 볼 수 있듯 슈페너의 개혁은 대단히 성서적이며 실천적임을 알 수 있다. 슈페너는 당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신앙생활에 대한 각성 운동으로 성서에 대한 열심 회복과 선행과 거룩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성서 중심, 실천 중심의 교회 개혁을 통한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김문기 박사(평택대)는 슈페너가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설교에 있어서도 하나님 말씀 중심의 설교에 집중했으며 경건 향상의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에서 실천적인 운동을 요청했다고 논증한다. 성경 중심, 실천 중심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경건주의는 분명 복음주의에 닿아있다. 그것은 분명 생명력 있는 신앙에 대한 욕구를 촉구했다. 프랑케의 할레 경건주의는 개인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들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교회에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가 성경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복음주의는 1720년대 시작된 제 1차 각성운동과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 1714-1770)의 설교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달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를 통해 영국교회 갱신 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 에즈베리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 2차 각성운동은 19세기 초 찰스 피니 등의 주도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신앙의 분리를 촉구하여 훗날 진화론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과학과 종교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부흥 운동과 국교(國敎) 분리의 결함은 미국 교회에 활력을 가져다 준 반면, 실용성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문제를 실용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대각성 운동은 복음주의를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배 세력으로 부각시켰으나 동시에 개인적 종교 경험과 지성적 엄격성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켰다.
현대 복음주의는 이들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로 그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과학적 사고와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와 같은 현대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조금씩 분화 되고 보다 세련화 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성을 가져다주고 과학적 해석에도 혼돈을 야기한 경향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공동체 속에 공통 유업과 관심사를 결합하는 자들의 초교파 그룹 및 모임이기도 하다. 1846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EA)과 1942년 미국에서 창립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등이 그것이다. 마크 놀은 복음주의를 초자연적 중생의 필요를 강조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고백하며 선교와 전도를 통해 복음전파를 촉진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한다고 서술한다. 앤더슨(R. S. Anderson)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세 가지 관심, 즉 정통주의 교리, 성서의 권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체험에 대한 관심이라고 표현했다.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맥그라스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에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는 분명 명백한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충분하다. 여기서 신학적 방법론에 관한한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복음주의는 청교도 작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남긴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freedom; in all things, love/ in necessariis unitas, in non-necessariis livertas, in utrisque caritas)이라는 명언처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복음주의는 우리 시대의 주도적 세계관과 대면하면서 복음주의적 지성을 담아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말처럼 복음주의자는 이성과 학문의 위험성을 아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버리는 일에 익숙한 포스트모던의 상황에 복음의 진리를 담아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과학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과학관은 어떤 것일까.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들 복음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맥그라스는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에 따른 역사적 교회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령의 주권, 인격적 회심의 필요성 그리고 복음 전도의 강조가 일반화된 복음주의의 여섯 가지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복음주의 과학관은 복음주의자들처럼 성경의 권위와 전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복음주의 과학관은 복음주의의 근간이 되는 성경이 증거하고 정통 교회가 고백해 온 모든 교리와 전통의 범위의 신학 방법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터와 더불어 복음주의자의 뿌리와 같은 칼빈의 신학 방법론 가운데 적응의 방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도 인격적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부정하나 피조된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즉 복음주의 과학관은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 자연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이 발현됨을 믿는다(시 19편 ,롬 1:20, 사 40:26). 여기에는 하나님의 공유적, 비공유적 특성 가운데서 나타나는 완전성, 영원성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삼위일체적 사역의 흔적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일신론적 계시가 아닌 자연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찾으려 했던 어거스틴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가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 그의 방법에 당연히 주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해석한다. 적응의 방법은 피동적 해석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요 청지기로서 미래의 자연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응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단순한 변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는 과학 기술을 포함한 시대적 상황을 늘 주목하고 기원과 윤리에 대한 반성경적 주장에 대한 적극적 반응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복음주의 과학관의 실천적 모색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Ⅵ. 나가면서
창조과학운동이 창조론 운동의 최전선에 서서 성경과 기독교를 옹호한 것은 분명 칭찬할만한 일이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이요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흔적이 담긴 일반 계시의 광장이라는 복음주의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성경을 과학에 잘못 적용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분명 있었다. 문자적 해석은 간혹 엉뚱한 해석을 이끌어 내었다. 또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중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찬드라 위클라마싱(Chandra Wickramasinghe)이 주장한 우주 설계(창조주)에 대한 확률적 주장을 창조과학적 결론으로 기쉬(D. Gish)나 한국창조과학회가 곧장 이용하는 경우이다. 이들이 계산해보니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성 단백질들이 한 곳에서 우연히 생성될 확률은 겨우 10의 4만승 분의 1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우주에 겨우 모든 원자의 숫자가 10의 80승 밖에 되지 않으므로 설령 우주 전체가 단백질 스프(soup)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단백질이 우연히 생길 확률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을 신뢰하는 학자도 아니고 창조과학자도 아니다. 호일은 지구의 생명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은 38억년 전에 혜성에 실려 지구에 도착한 미생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판스퍼미아(panspermia)설을 주장하려고 이런 주장을 편 것이다.
창조과학이 복음주의 과학자들과는 대화를 거부하고 충돌하면서 이들 진화론 과학자들의 주장을 입맛에 맞게 포장하여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창조과학 운동이 복음의 탁월한 전사(戰士)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과학들에게 비판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창조과학이 호일(Hoyle)과 같은 비성경적 과학자들의 견해는 취사 선택하여 유리한 증거로 삼으면서도 오히려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는 진지한 문을 열지 않고 강한 분리적(分離的) 입장에 머무른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창조과학은 창조 과학자들이 이 어리석은 세상과 신자들을 과학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계도해야 한다는 과학적 엘리트주의에 빠져버리곤 한다. 이때 성경 해석은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다. 즉 성경은 창조과학자들의 눈에는 그만 전혀 엉뚱한 창조과학적 관심의 책이 되고 만다. 성경이 창조주를 지시하나 과학에 관심의 중심을 둔 책은 아님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과학은 성경과 과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불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기원, 지구의 연대, 그리고 지질학적 생물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분명하게 사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듦으로써 복음주의에 손상을 주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능력을 어둡게 만들었던 것이다.
근본주의적 사고 습관은 창조론의 개별적인 결론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편향적 특성과 19세기의 반지성적인 특성이 이러한 사고 습관에 덧붙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 습관은 기독교 지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고 말았다. 문제점은 자연 세계의 지식에 대해 너무 공격적이고 이원론적이다. 창조론자들이 과학의 기만적인 주장을 공격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전략은 기독교 (기독교는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건의 실체의 중요성을 항상 주장했다)와 실증적인 과학(과학은 항상 세상에 대해 종교와 비슷한 가정을 전재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의 접촉점에 대한 이후의 논의에 혼란을 초래했다. 서구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타협은 항상 뒤얽혀 복잡했고 어떤 경우에는 역설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의 지성적인 전쟁 상태로 갔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창조과학적 근본주의 창조론 운동은 종교와 과학의 타협을 전쟁의 가장자리로 밀어 넣었다. 현대 창조론의 가장 큰 비극은 창조론의 전투적 경보음 때문에 탁월한 복음주의 기독교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들의 저작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전 시대의 메마른 곤경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조과학은 그렇게 대화하지를 않았다. 직접적인 실증적 증거가 없으면 억측하면 안 된다. 억측에 의한 것으로부터는 연역할 수 없으며, 폭 넓은 실증적 증거가 없으면 과학은 불가능하다. 창조과학이 성경과 관련해서는 잘못된 베이컨주의를 고수하고 과학과 관련해서는 건전한 베이컨주의를 포기했다는 점은 계속 지적당하는 뼈아픈 실책이 되고 있다.
사실 창세기의 앞 부분을 정확히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대 세계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연구와 그 뉘앙스를 조심스럽게 살린 주해가 필요하며, 그리고 과학적 과정과 결과에 대해 폭 넓게 정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편협한 울타리를 치고 무조건 고집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유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채롭고 풍성한 세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인간 개인의 생각의 울타리 안에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서로 겸손하게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창조과학은 그러하지를 못하였다. 견해가 다른 복음의 친구들에게 조차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였다는 비판을 복음주의자들에게조차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창조과학이 성경의 무오성을 사수하고 하나님의 흔적을 성찰하는 자연 계시를 주목한 면에서는 탁월했으나 칼빈의 적응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 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하나님이요 남녀노소, 시대적 모든 사람들에게 적응할 수 있을 만큼 몸을 낮추시는 분이심을 간과한 것이다.
칼빈의 적응 이론이나 프린스턴의 복음주의 학자 워필드가 과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휘트콤이나 모리스, 기쉬와 조금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창조 과학의 결론을 포함하여 복음주의 과학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단순하거나 상식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은 복음주의 지지자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도덕적 문제와 분명히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지질학에 정통한 복음주의자들의 결론과 좀 더 넓은 복음주의 세계의 확신을 대조시켜 볼 때 과학에 대한 복음주의 사상의 사회적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의 영감을 옹호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경험 많은 지질학자인 데이비스 영은 자신의 과학적 연구를 근거로 모리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영에게도 복음주의자로서 성급한 면이 없지 않다. 즉 성경과 자연 세계 둘 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기독교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창조과학에 대한 무조건 반대보다는 대화의 필요성이 더 절실하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과학과는 또 다른 형태의 극단주의에 빠질 위험이 생긴다.
창조과학은 분명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다. 반성경적 주장으로부터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전투적 헌신과 복음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경과 과학 해석(解釋)의 누(累)를 범하거나 복음의 친구를 잃어버려서도 안 된다. 창조과학이 가끔은 지사적(志士的)이고 계몽 운동가적인 의협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겸손히 눈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한계를 겸손히 깨닫고 복음의 이웃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제 창조론 운동은 창조론 오픈 포럼(OFC)과 같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모두 함께하는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창조와 구속과 과학의 발달에 따른 적응의 방법 모두에 귀를 기울인다면, 대화를 거부하는 독단적 운동이라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활로를 열고 복음의 대타협과 대연합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과학으로 세상과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고는 제 1회 백석대교수초청 창조론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