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와 교황청 사이의 갈등 진상은?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이의 학문과 신앙
16세기 말 두 사람의 탁월한 천문학자가 천체를 관측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수도사가 되려 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였고 또 한사람은 목사가 되려 했던 7살적은 요한 케플러(1571-1630)였다. 한 사람이 로마 가톨릭의 굳건한 영향권 속에 있었던 오늘날의 이탈리아 태생인 반면, 한 사람은 종교 개혁의 영향 아래 있던 독일 태생이었다. 케플러는 이미 다룬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갈릴레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지난 1992년 말, 바티칸의 가톨릭 교황청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 재판에 회부돼 파문을 당했던 중세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명예를 정식으로 회복한다는 복권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작은 기념우표도 발행하였다. 이것은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의해 파문을 당한 지 실로 350년 만의 일이었다. 중세의 암흑시대에 누구보다도 먼저 천체의 현상을 깨닫고 담대히 외쳤던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비록 지리적으로 굳건한 바티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성경적 삶을 실천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갈릴레이의 어린 시절
1564년, 유럽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한 사람과 문호 한 사람이 태어났다. 바로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와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피렌체, 시에나 피사 등이 여기에 속함)의 피사에서 오래 귀족으로 정착해 살았던 빈센치오 갈릴레이의 일곱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피사는 아름다운 아르오 강이 흐르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서쪽 바닷가에 있는 도시이다.
그의 아버지 빈센치오는 포목상을 경영하면서도 류트(중세 유럽에서 사용하던 오래 된 현악기의 하나)의 명연주가였다. 그뿐 아니라 악기를 직접 제작도 하고, 음악의 이론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며, 음악과 관련된 수학적 법칙을 발견하여 당시 음악계의 권위자였던 지오세포 잘리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일 만큼 유별난 사람이었다. 갈릴레오가 훗날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완고한 과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당하며 심지어는 종교재판까지 당한 것은, 어쩌면 진리 앞에서는 굽힐 줄 모르던 그의 아버지의 독특한 성격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예술적인 가정의 분위기에서 자라며 성장한 갈릴레오는 음악과 시를 사랑하며, 그림을 즐겨 그리고 특히 류트와 오르간의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재주도 닮아 장난감도 스스로 만들어 놀며 수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574년,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플로렌스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게 된다.
수도사가 되려던 아이
찬송을 즐겨 부르고 오르간을 즐겨 연주하던 갈릴레오는 믿음의 열심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갈릴레오는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는 종교 음악과 수도원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수도사가 되려는 것은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음악을 사랑하던 아버지 빈센치오는 갈릴레오가 음악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였으나 장남인 그가 수도사가 되려는 소망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마침내 유명한 산타마리아의 베네딕트파 수도원 학교에 들어간 갈릴레오는 종교 훈련과 르네상스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수도원 학교에서의 교육은 오히려 그의 신앙심을 점점 더 불붙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며 평생을 수도사로 살자.’
갈릴레오는 수도원 생활을 결심하고 아버지께 알렸다.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정말로 수도사가 되려 하자 적극적으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갈릴레오는 1581년, 수도원 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치게 된다.
열일곱 살 되던 해 갈릴레오는 피사대학의 의학부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 학문의 중심지였다. 영국에 겨우 세 개의 대학이 있었던 데 비해 이탈리아는 열세 개의 대학이 있어, 르네상스라 불려 지던 당시 유럽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있었다. 1088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도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주의 북쪽에 있던 볼로냐대(University of Bologna)였다.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고집 센 아이
하지만 당시 대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옛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고를 거부하고 권위주의만 내세울 뿐이었다. 진리를 사랑하며 시대를 앞서 가던 갈릴레오의 눈에 이런 대학의 모습은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느껴졌고 불평만 자꾸 늘어가게 만들었다. 자연히 교수들과의 논쟁도 많아졌다.
“갈릴레오 학생은 고집만 센 학생이야.”
교수들과 친구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논쟁꾼”이었다. 아마도 오늘날 같으면 그는 영락없는 불평 투성이의 불량한 학생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 학비는 떨어져갔다. 게다가 의학에 대한 흥미도 잃어버린 갈릴레오는 1584년, 결국 학업을 마치지도 않고 대학을 떠나게 된다. 학교는 떠났지만 이때 이미 그는 흔들이(진자, 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이라는 물리학의 유명한 법칙을 발견한다.
“갈릴레오, 네가 수학과 물리학에 취미가 있으니 아버지의 친구 오스틸리오 리치를 한번 만나보자.”
학교를 그만둔 갈릴레오를 걱정한 아버지 빈센치오는 친구인 리치 교수에게 아들의 지도를 부탁한다. 리치의 지도로 갈릴레오는 유클리드의 수학 이론과 아르키메데스의 이론들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를 받은 지 1년이 지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정교한 저울을 만드는가 하면 어떤 고체의 무게 중심에 대한 수학적 정리로 금세 주목받는 과학자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갈릴레오는 모교인 피사 대학에 3년 기한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가 되자마자 혈기 방장한 그는 낡은 제도와 당시의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을 거침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사의 사탑 실험 일화가 상징하는 것들
이때는 그가 학자로서의 열심이 시작되던 시기이다. 또한 낡은 생각에 젖어 있던 당시 기득권을 지닌 학자들의 미움을 받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에 얽힌 일화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어떤 것들은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때로는 그를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과학적 업적이 많았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또한 그에 얽힌 일화 가운데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 섞여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화들을 잘 검토해 보면, 단순히 잘못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그의 학문적 업적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역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비비아니가 전하는 피사의 사탑에서 있었다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도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1590년, 당시 25세의 청년으로 토스카나의 피사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갈릴레오는 물체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속도에 관해 공개 실험을 하기로 작정한다. 물체가 공중에서 어떤 식으로 떨어지는가에 대한 연구는 갈릴레오 이전부터 있어 온 것이었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보다 먼저 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갈릴레오는 이 이론에 의문을 품고 실제로 높은 곳에서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떨어뜨려 실험을 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피사의 사탑을 실험 장소로 택하였다. 피사에 있는 대사원에는 종루로 쓰이던 180피트나 되는 탑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갈릴레오는 손에 두 개의 금속 공을 들고 탑의 긴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7층의 복도로 나갔다. 두 개의 공 무게는 각각 1백 파운드와 1파운드였다. 이 실험을 보기 위해 피사 대학의 교수와 학생, 철학자 등 많은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갈릴레오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복도의 난간 끝에 서서 두 개의 공을 들고 동시에 떨어뜨렸다. 모인 군중들은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때까지 믿고 있었던 대로 무거운 공이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공은 훨씬 늦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란히 떨어졌고, 그것도 똑같은 시간에 동시에 떨어지는 단 한 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일화를 전한 비비아니는 훗날 갈릴레오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와 유사한 실험은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군사 기술자였던 스테빈(1584-1620)이 갈릴레오보다 먼저 실시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이론에 대한 의문점은 이미 6세기에 비잔틴 학자였던 필로포누스가 연구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위의 실험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도 갈릴레오가 주장한 것이 위의 내용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이들 흥미로운 일화들은 사실의 진위를 떠나 갈릴레오의 과학적 업적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실제로 그는 경사면 실험을 통하여, 수직인 경우에도 이들 낙하 법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유추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두 우주 구조에 대한 대화」에 보면 분명히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나는 무게 1백 파운드나 2백 파운드가 되는 탄환과 소총의 탄환을 2백 규빗(1규빗은 팔꿈치로부터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약 45센티미터 내외)의 높이에서 동시에 떨어뜨리면 포탄이 총탄보다 손바닥 길이만큼도 먼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낙하 속도와 질량이 무관하다는 이 이론은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였을 때 깃털과 쇠공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통하여 전 세계에 TV로 방영되었다. 공기의 부력이 작용하지 않는 진공인 달의 표면에서 이루어진 이 실험이야말로 완벽한 것이었다.
탁월한 천문물리학자 갈릴레이
피사 대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던 스콜라 학파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끝없이 논쟁하던 갈릴레이는 결국 이곳에서도 사퇴를 하고 파도바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유럽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그는 이곳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갈릴레이의 업적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이때 발명한 천체망원경과 지동설을 주장한 그의 이론이다.
“하늘의 만상(별들)은 셀 수 없으며”(예레미야 33장 22절).
예수님이 탄생하기 150년 전,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별들의 수를 세어 보기로 하고 하늘을 구역별로 나누어 세밀히 조사한 적이 있다. 이들의 결론은 별들의 숫자가 약 3,000여 개쯤이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고대의 천문학자 톨레미는 1,056개, 중세의 유명한 천문학자 브라헤는 777개라고 주장하였다. 갈릴레이와 동시대인이면서 함께 지동설을 주장하고 개신교도였던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는 1,005개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별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지만 그 숫자는 많아야 3,000여 개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탄생하기 600년 전에 이미 하늘에 있는 별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1608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천체 망원경을 발명한 이후의 일이었다. 오늘날 우주에는 은하계의 숫자만 수십억 개 이상이 된다고 천문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각 은하계는 수십억 내지 수백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어떠한 과학자도 별들의 숫자를 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별의 수를 아시는 분이며,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는 창조주이심을 선포하고 있다(시편 147편 4절 참조).
이와 같이 우리 인류가 우주의 넓은 모습을 알게 된 것은 바로 모두 갈릴레이의 덕분이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천체의 많은 별들을 관찰하였으며, 특별히 태양의 흑점을 찾아냈고, 목성에도 지구처럼 달(위성)이 있음을 최초로 발견하였다. 갈릴레이는 목성 주변에서 이오(Io), 유로파(Europa), 가니메데(Ganymede) 그리고 칼리스토(Callisto)라고 이름 붙여진 위성들을 찾아냈다. 이들 4개의 목성의 달들을 갈릴레이 위성들(The Galilean moons or Galilean satellites)이라 부른다. 이후 목성에서는 크고 작은 100개가 넘는 위성들이 발견되었다. 갈릴레이 위성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최초 발견한 위성들이었다. 태양계 위성들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이들 위성가운데서도 가니메데는 행성인 수성보다도 직경이 큰 위성이다. 유로파는 최근 물이 발견되어 생명체 존재 가능성에 대해 관련 과학자들이 호기심을 갖는 위성이고 이오 위성에는 여전히 활동하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활화산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토성 고리의 존재나 달 표면에 산과 골짜기가 있음도 그가 처음 밝혀낸 것들이다. 그리고 달의 광명은 태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냈다. 어쩌면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찰한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연구는 그 당시 별다른 장비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만 답습하던 고집 센 다른 과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 단계 발전한 뛰어난 것이었다. 과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 그에게는 또 다른 기쁨도 있었다.
“아버지, 우리 둘이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갈릴레이의 사랑하는 큰딸 비르기니아와 작은 딸 리비아가 함께 수녀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젊은 시절, 한때 수도사가 되기를 소원하였던 갈릴레이는 두 딸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는데 한 권은 자연이라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성경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에서 배운다.” 이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갈릴레이의 유명한 신앙고백이다.
교황청과의 갈등
그런데 신앙과 학문에 있어 열심이었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다가왔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의 연구 결과들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1615년, 갈릴레이는 바닷물이 주기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조수 운동이, 지구의 자전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지동설을 주장하였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견해에 동조하는 이론이었다. 그는 곧바로 가톨릭 추기경에게 불려가게 된다. 1615년 2월 도미니크 수도회의 한 탁발수도사가 갈릴레이에 대한 고소장을 로마 종교 재판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1년여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해 12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로마로 갔다. 하지만 1616년 2월, 로베르토 벨라르미네 추기경은 종교 재판소의 이름으로 갈릴레이에게 경고하였다.
“갈릴레이의 글들은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지구가 움직인다는 관점을 유지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경고한다.” 당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발견하고도 무사히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우회(迂回)”라고 알려진 이 유명한 경구(警句)는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서 교묘하게 교황청의 눈길을 벗어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지오르다노 브루노(1548-1600)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옹호하다 그만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물론 그가 당한 화형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 누군가 다시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같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포기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아버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거예요.”
마리아 셀레스타 수녀가 된 사랑하는 큰딸의 편지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추기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대화」(1630년), 「조수에 관한 대화」(1632년) 등 유명한 그의 연구 결과들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과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갈릴레이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 책들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으며 갈릴레이가 곧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문대로 이 책들은 1632년 8월에 판매가 중지되었으며, 그 해 10월 갈릴레이는 교황에게 소환되었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로마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엄숙히 개정되었다.
“갈릴레이의 말과 글에 누구도 동의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도 지구가 움직인다거나 태양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금지한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눈물을 머금고 교황청에 굴복하였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잘못을 시인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불온한 글들을 발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신앙인이요 과학자로서 갈릴레이의 이 같은 고백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는 첫 번째 신문에서는 자신의 책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음을 강력히 옹호하였지만, 두 번째 신문에서 고문의 위협에 굴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연히 그는 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나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렇게 정죄를 받게 된 데에는 당시의 복잡한 종교,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갈릴레이는 본래 당시(1623) 교황 우르반(Urbanus) 8세로 선출된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갈릴레이는 우르반 8세 아래 좀 더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통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갈릴레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갈릴레이와 새 교황을 함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수잇 교단이 갈릴레이의 라이벌이었던 자기 교단의 천문학자 오자리오 그라시를 내세워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황이 된 후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의 하나인 토스카나 공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하던 교황이 그를 정죄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결국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끝났으며 갈릴레이의 예상보다 더 가혹한 선고가 내려졌다. ‘이단 혐의가 농후한’ 중한 이단에 속하는 죄를 범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후 9년 동안 그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이로 70세 노인이었던 갈릴레이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갈릴레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1987년)에는 갈릴레이가 원자론도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그가 원자론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동설 주장 혐의로 재판을 받게 선처를 해주었다는 프랑스의 과학 역사가 레도니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은 갈릴레이가 얼마나 앞서간 뛰어난 과학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욥기서 26장 7절에는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달이 지구를 돌듯 지구도 태양을 돈다는 것이 성경과 전혀 어긋나지 않음을 나타낸다. 갈릴레이는 이것을 아는 과학자였다. 잠언 8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셨고 궁창으로 해변을 두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두르셨다는 말은 동그랗게 하셨다는 뜻으로 지구의 둥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6).
이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자전하는 지구가 공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자전하고 있음을 놀랍게도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겨우 중세의 기독인 과학자였던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등에 의하여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재판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플로렌스의 작은 농장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구금되었다. 늙은 갈릴레이에게 이제는 딸 셀레스타 수녀의 위로만이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의지하던 사랑하는 셀레스타 수녀가 아버지의 혹독한 시련에 따른 마음고생 때문이었는지 1634년 돌연 사망하고 만다. 딸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갈릴레이는 1637년 마침내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를 굽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강의와 수학적 증명”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이것은 그로부터 50년 후에야 뉴턴에 의해 발견된 운동의 제 1 법칙을 설명한 위대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천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견해도 상세히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이탈리아가 아닌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몰래 출판되었는데, 이곳은 일찍이 1575년, 개신교 대학이 설립될 정도로 과학과 신앙이 자유로운 곳으로 갈릴레이의 책을 출판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그의 진정한 상처는 단지 주위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자”라고 수군거리는 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갈릴레이의 신앙과 고집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증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갈릴레이의 말년과 신앙
그러나 분명 그는 진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주위 친구들에게 항상 기도 부탁을 잊지 않았고, 교회 예배에 결코 빠지지 않은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지속적인 두 가지 평안이 있다. 하나는 나의 글 속에서 거룩한 교회를 빗나가는 어떤 그림자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양심의 증거가 있다. 지금은 비록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은 나의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아실 것이다.”
비록 교회와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신앙과 학문을 비난하였지만, 한때 수도사가 되려 했던 갈릴레이는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던 경건한 사람이었다. 갈릴레이처럼 실명(失明)하였던 영국의 문학가 밀턴은 자신의 장대한 종교적 서사시 『실락원』에서 갈릴레이와 천문학에 관한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젊은 시절 만나 본 적이 있는 이 위대한 과학자의 신앙과 학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1642년, 제자인 비비아니와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된 또 한사람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갈릴레이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죽은 후 제자 비비아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기독교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영혼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겼다.”
그가 죽자 교회는 그를 외면하였으며, 갈릴레이의 관과 무덤도 만들지 못하게 하였고, 고향에 묻히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30년 후, 교회는 그의 유죄를 취소하게 된다. 그리고 100년 뒤에는 무덤과 묘비가 세워졌으며, 인쇄가 금지되었던 책들은 200년이 지나 모두 허용되었다. 그런 후 350년이 흐른 지난 1992년 말, 명예가 정식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국제기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행한 첫 번째 천문학적 관측들을 기리기 위해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실험가요 발명가였으며 음악가요 저술가요 적극적 논쟁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금은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 갈릴레이! 결국은 갈릴레이 당대의 종교적·정치적 다수가 아니라 그가 옳았다!
이렇게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운행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진리를 쫓는 신앙의 과학자였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