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가 탐색 5- 성 어거스틴(조덕영 교수)
기독교사상가 탐색- 성 어거스틴(조덕영)
교회사 속의 인물과 영성
"나의 모든 소망은
오직 당신의 긍휼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소서!"
-어거스틴-
기독교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사상가!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다 같이 존경하는 교부 신학의 완성자!>
1. 어거스틴의 생애와 당시 상황
1) 출생= 354년 11.13일 북아프리카에서 출생
2) 당시 로마의 식민지에서 가난한 로마 시민권자의 아들
3)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 기독교인
4)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과 라틴어를 배우다.
5) 카르타고에서 방탕한 생활 시작(372년 첫 아들 Adeodatus 탄생)
6) 신흥종교 마니교에 빠지다( 구약과 신약 신은 서로 다르다/ 신약의 신이 더 우월/ 예수도 훌륭한 스승/ 헌신/ 금욕/ 채식 강요). 어머니의 근심! 9년 계속!
7) 377년 아프리카 총독 주관 웅변 대회 우승. 친구 마니교로 개종!
8) 대학 교수가 되다
9) 383년 환락 도시 로마 행! 어머니 반대!
10) 밀라노 수사학학교 교장이 되다!
11) 웅변을 들으려고 기독교 설교를 몰래 듣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조금씩 누그러 지다!
12) 회심!
386년 8월 하나님께 부르짖음! 아이들 노래 가사! 펴서 읽어라(Tolle Lege)!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중략-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못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 12-14!>
13) 암브로스의 설교에 감화. 세례 받다.
14) 북아프리카 교구 감독이 되다!
2. 주요 사상
1) 펠라기우스(영국 아일랜드 태생/ 경건한 수도사설/ 5세기초 로마 행)와 논쟁
펠라기우스=
(1) 원죄는 없다
(2) 선행 능력 강조
(3) 유아 세례 반대(유아는 타락 이전 상태이므로 세례 받지 않아도 영생)
(4)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가에 집중해야 하는 자기 운명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2) 어거스틴의 원죄론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2) 인간 원죄는 도무지 치료받을 수 없는 질병과 같다
(3) 원죄는 감당 할 수 없는 힘과 같다(진흙탕에 빠진 트럭)
(4) 원죄는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죄책이다.
3) 어거스틴의 은총론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거스틴을 은총박사Doctor Gratiae라 부르는 이유).
(1) 은혜는 그리스도의 값으로 얻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2) 은혜는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의 힘에 의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죄인은 없다!!
(4)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임한다(고전 15:9-10)
(5) 즉 은총은 자유의지보다 선행한다!.
# 1.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 정죄(412년 카르타고 회의)
2. 418년 펠라기우스도 정죄
3. 원죄 교리 확정 및 은총만을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복음 확정
4) 어머니를 떠나 로마로 떠나던 어거스틴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1) 은혜가 인간 본성을 해방한다.
(2) 은혜는 인간 본성의 치유자 이다.
5)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근거 제공
6) 연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죽음의 중간 지대에 대한 암시(죽은 어머니 모니카를 위한 기도!). 개신교와 다른 사상.
3. 자연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상
3-1. 자연과 이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이성과 신앙 모두를 진리에 이르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길잡이로 보았던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이 볼 때 인간이 가진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는 credo ut intelligam(이해하려면 믿어라)과 intellege ut credas(믿으려면 이해하라) 양편이 모두 중요했다. 물론 어거스틴의 신학은 신적(神的) 은총과 인간의 무력함에서 출발한다. 그를 개혁신학의 원조로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은 명령하지 않으신다"(Non igitur Deus impossibile iubet)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행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청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라 했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요람이나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단순한 요람이 아니다. 자연은 생육하고 번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정복하고 가꾸고 해석하고 누리는 곳이다. 어거스틴이 숫자나 음악이나 천문학 심지어 지리학, 식물학, 동물학 등에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즉 인간도 자연처럼 피조물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지고 창조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것을 추구한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의 첫머리에서 고백한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한 인간이 가진 욕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여 인간이 참 기쁨을 누리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쉼)을 얻기 전에는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결국 자연과 이성은 포스트모던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인 것이다.
자연과 이성에 대한 이 같은 어거스틴의 관점은 이교 학문조차 모두 거짓과 미신으로 가득찬 것으로 보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 비록 구원의 도구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는 훌륭한 가르침과 탁월한 도덕적 가치가 들어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진리도 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광맥에서 캐낸 금이자 은이다. 다만 악령의 숭배에 부적절하고 부정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 일반 학문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고 신학과 기독교 철학의 길을 여는 데 어거스틴의 공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3-2. 자연에 대한 어거스틴과 칼빈
자연에 대한 어거스틴의 생각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빈에게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칼빈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종교의 씨앗(the seed of religion)은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보았다. 즉 칼빈도 자연의 은총과 계시를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칼빈은 자연과 우주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보고자 하였다. 그가 사용한 “책”, “거울”, “궁전”, “휘황찬란한 극장”, “무언(無言)의 교사” 등의 용어들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칼빈이 보기에 이와 같은 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란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까지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자연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미지인 거울, 극장, 책 등의 이미지를 그대로 자연 묘사에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의 창조주와 구속의 주에 대한 확신에 관한 한 어거스틴과 칼빈의 생각은 동일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고백에는 그런 경험이 깔려 있다. 이 때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구원은 연결된다. 이러한 상태의 원인은 피조물이요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불만족과 공허감’으로 해석된다. 즉 반대로 구속 신앙을 가질 때 창조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이 무의미 한 것은 오직 성경적 창조와 구속을 믿지 못할 때뿐이다. 그런 면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칼빈을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자라고 소개한 것은 잘못된 신학해석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과학신학을 추구하는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칼빈을 자연신학 반대자라고 바르트가 표현한 것은 실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자신의 위대한 형상 안에서 인간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한 조각의 흔적을 가지고도 알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로 꽃동산과 산들바람을 가지고도 기뻐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를 항상 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거만함과 의심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로 길이를 재듯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만드시고,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허락하신 분이다.
3-3. 자연(창조 세상)에 나타난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 (삼위일체의 흔적)
자연 계시에 대해 어거스틴이 칼빈과 유사하기는 하나 일부 다른 점이 있었다. 어거스틴은 자연을 보는 데 있어 좀 더 깊이 나아간 듯하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은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고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주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지성에 뛰어난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복음의 방해물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痕迹)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로 나아간다.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개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고대부터 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있어왔다. ‘베스티기움’(Vestigium)은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설명할 때, 그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설명하는 형식과 자료를 의미한다. 즉 자연의 예증이나 사변적 유추에서 그 흔적들을 찾게 된다. 일반적으로 ‘베스티기움’은 ‘흔적’이라고 번역한다.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우매한 도전을 하느냐는 비판 앞에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연구나 설명은 늘 위축되거나 주춤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에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신론에 있어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준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하였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H. M. Morris)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이 집중된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덕영 교수(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