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1886-1968, 하나님의 자유로서의 초월성)
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칼 바르트처럼 한국 신학 안에서 극명하게 평가가 나누어지는 신학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존주의, 기독론중심의 신학자, 신정통주의, 변증법적 신학, 위기의 신학, 반자연신학주의자, 신보편구원설 등 그를 지칭하는 신학의 색깔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국내적으로 바르트 신학은
코넬리우스 반 틸을 영향 아래 비판적인 교단(예장 고신, 합동, 합신, 예장 개혁, 예성 등)이 있는 가하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교단(예장 통합, 기성, 한신 등)의 신학자들로 나누어집니다.
또한 같은 교단 안에서도 신학자들마다 바르트에 대한 입장이 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1. 생애
1) 1886. 5.10. 스위스 바젤 개혁파 교회 목사(Fritz 바르트) 장남. 소년, 청년기 베른.
2) 1904. 베를린대. 종교사학파 구약학 궁켈(1862-1932), 하르낙(1851-1930) 사사
3) 튀빙겐에서 보수신학자 슐라터(1852-1938), 바르부르그 대학 헤르만 사사(당시 불트만, 고가르텐 동문)
4) 1911-21. 스위스 자펜빌 목회
5) 1911년 로마서 주석 출판("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사이의 간극"-변증법 사용-,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가톨릭 신학자 Karl Adams)
6) 1921 괴팅겐 대, 1925 뮌스터 대 교수, 1930 본 대학 교수 취임(1932, 모차르트 음악 들으며 <교회교의학> 집필 시작 1968까지 계속, 8천면에 달하는 12권 미완성 저서)
7) 1933년, 나치가 복음교회 사실상 지배(롬 13:1). 1933년 복음교회는 75% 나치 지지
8) 당시 제자 본 회퍼(1906-1945)- 본 대학
9) 1934. 5. 31. 바르멘 선언 주도- 5개 조항(히틀러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와 고백 교회 운동)-외국인으로 추방
10) 고향 바젤로 돌아와 신학 강의
11) 종전 후 다시 독일(1946-47) 교의학 강의
12) 바젤대 강의, 1968. 12.10일 83세 일기로 세상 뜨다. 명예박사는 많으나 학위는 못함
2, 신학적 방법(긍정과 부정)
1) 부정: 자연신학에 대한 회피
2) 긍정: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만남
3. 하나님 말씀과 성경
1) 하나님 말씀 세 가지(계시·복음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복음 선포 곧 설교)
2)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구분
4.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 신학
1) 바르트 신학 구조의 핵심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신학의 기본으로 간주하여 신학 전개-네 가지 주제
(1) 하나님의 말씀론:
예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즉 삼위일체론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산물
(2) 신론,
(3) 창조론,
(4) 화해론
"하나님은 행동 가운데in activity 존재하시며 살아가신다."(존재와 행동의 동일시)
2) 삼위일체 회복(존재 양태Seinsweise로서 전통적 위격persona, Hypostasis보다 양태mode라는 말을 좋아함)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독특한 자기 계시로서의 인격 안에 계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4) 삼위일체 교리를 자신의 신학(하나님 교리)의 출발점에 두다
5)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삼위일체 상황 안에서)
6)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론적 사변이 아니다.
7) 그 하나님 자신은 사랑(요일 4:16).
5.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1) 신적 탁월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사랑
2)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
6. 선택 교리
1)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척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2) 보편적 구원apokatastasis 문제에 대한 에밀 부룬너의 질문에 답변 거부
칼 바르트(사진 우편)와 에밀 브룬너(유광웅 교수님 제공)
7. 바르트와 성령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나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로 인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분이 계신지를 알도록
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 우리에게로 돌이키소서!"
"Komm, Schöpfer, Geist" (K. Barth & E. Therneysen, "Come, Creator, Ghost", 1924, 170)
-"Komm, Gott Schöpfer, Heiliger Geist"
( "Come, God Creator, Holy Ghost")-
<라틴어 "Veni Creator Spiritus"를
기반으로
마틴 루터가 쓴
오순절을 위한 루터교 찬송>
개신교 최초 예배 풍경의 원형이 남아있는 독일 북부 한자동맹 도시 뤼벡의 루터교회 예배 풍경(동영상)
한자동맹의 도시 뤼벡의 개신교 루터파교회 개신교 최초 예배 풍경의 원형이 남아있는 독일 북부 한자동맹 ...
1) 하나님 인식(Gottes Erkenntnis)의 주체로서의 성령
(1) 계시: 성령은 계시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을 혼동하는 신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대한 비판(<로마서 강해 1판>, 1919)
(2) 구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갈 4:6; 롬 8:9; 빌 1:19; 벧전 1:11)이다.
*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결단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의 결단을 통해 새 창조의 길을 여시는 영
* 즉 죄로 물든 세상과 부활 하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시는 새로운 세계 사이의 결단.
*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영이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성령이 그 계시의 주체다.
(3)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하는 영’이다.
바르트의 성령론은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도록 하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 Nachfolge)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에게 있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새롭게 하는 영이다.
2)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Der Heilige Geist und das christliche Leben, 1928, 뮌스터)
(1) 창조주 :
창조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인간이 개념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현실이자 현존과 작용에서 계시의 사건 안에 있는 주관적 측면
(2) 화해자(화목자, Versöhner) :
*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해 스스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령 앞에 설 때 인간은 죄로써 하나님에 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하지만 은총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말씀을 통해, 혹은 그리스도를 위해” 칭의와 성화의 주체이다. 인간은 이에 순종함으로 응답할 수 있다.
(3) 구원자(Erlöser) :
* 성령은 약속의 영이다.
*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망 속에서 진리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되며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 즉 성령은 인간에게 “오시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죽 성령은 주어진 것(선물, datum)이 아니라 주어지시는 분(dandum)이며, 이미 성취된 것이 아니라 ‘약속’(verheißung)으로 알려지는 분이다(Der Heilige Geist und das christliche Leben, 1928, 465).
뤼벡의 교회 풍경
3) 성령과 예수와 교회
(1) 성령은 교회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한다
(2)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즉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식인 거룩하시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창조하시고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일깨우시는 영이시다.
(3) 성령은 공동체를 세우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친교로 이끄시는 영이다.
(4) 이 특별한 공동체는 성령을 통한 특별한 결속을 통해 고양(高揚) 되어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 일어난다.
(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령은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 교회가 되도록 격려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수 자신이 주체이시다. 이렇게 예수의 영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개신교 초기 풍경이 남아있는 독일 뤼벡의 마리엔 교회(루터파)
4) 삼위일체 속 성령과 자유
(1)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신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자유:
신성(Gottheit)은 하나님의 자유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전제조건이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신성을 통해 하느님은 하느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본래적 하나님 자신이다.
(2) 자유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즉 성령은 ‘주격’, ‘주관적 동기’로서 다른 두 존재 방식(성부·성자)와 함께 세계의 영도, 교회의 영도, 한 그리스도인의 영도 아닌 자유하신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 자신이다.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현 발현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경배되고 존경 받을 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성, 즉 자유의 영의 특성이다.
(3) 헬라어 프뉴마(Πνεύμα, 히브리어 "루아흐")를 통해 본 성령의 자유:
* 기운, 입김, 숨, 폭풍, 바람, 영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성령의 어원을 통해 예수님은 요한복은 3장 8절에서 성령의 자유를 말씀하신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의 자유로운 특성을 알 수 있게 한다.
(4) 경륜적 삼위일체 속 인간을 향한 자유의 영 :
성령은 인간을 “성령을 받고 성령을 소유하며 성령 안에서 살게 한다”.
(5) 진리의 영 안에서 비로소 자유인이 된 인간 :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길이요 진리인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체로 되지 않고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요 8:32).
(6) 즉 성령의 사역은 자유가 없는 것에서는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
(7)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창조하신 하나님
5) 성령과 성경
(1) 하느님 말씀 신학자로서의 바르트: 선포된 말씀(설교-성령), 기록된 말씀(성자), 계시된 말씀(계시-성부)
(2) 성부-성자-성령의 일반적 순서가 아닌 선포된 말씀으로 시작하는 바르트의 성령론 전개 : 성경의 말씀 선포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인식을 가능케 해 주는 성령
(3) 인간은 결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됨은 우리 인간의 판단이나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과 주권에 달려 있다. 성경은 성령을 증거하는 책이다.
(4) 문자(γράμμα)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성령의 역사(조명)가 없으면 성경이 아무리 그 근원이 거룩하고 그 영광이 클지라도 그 글을 읽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고후 3:14).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5)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령의 역사 :
* 성령은 성경의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역사한다.
*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성령에 두지 않고 교회에 두었다. 정통주의는 문자에 성령을 국한시킴으로 하나님의 자유한 은총을 상실하였고, 슐라이엘 마허는 감정과 신앙에 말씀을 혼합하여 “주관주의”에 빠져버렸다.
8. 삼위일체 흔적Vestigium Trinitatis에 대한 칼 바르트의 견해
1) 삼위일체 흔적Vestigium Trinitatis에 대한 칼 바르트의 부정적 견해
(1)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모두에 부정적이었던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당연히 피조 세계 속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2) 바르트는 사변적 사유나 자연계의 예증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거부한다. 절대적 그리스도 중심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신학에 토대를 두고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에게 있어 어쩌면 흔적에 대한 추적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3) 그러나 바르트가 삼위일체의 뿌리는 계시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바르트가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계시의 예증이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바르트는 이 흔적의 문제를 별도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만 바르트는 그것을 발견해서도 안되며 확인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4) 바르트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약성서가 증거하는 계시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계시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이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성서의 증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만 전달됨을 알 수 있다.
(5) 예수는 단지 철학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 곧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제시해 주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우주적 아버지로 있다가 맨 나중에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예수의 아버지요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6) 바르트는 성서적 계시 외에는 어떤 다른 계시나 삼위일체론의 기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교회의 흔적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이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사실 그러한 흔적을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종교와 심리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어떠한 유형이든 간에 모든 흔적은 의심스럽다. 계시를 떠나 피조자의 계시에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그 교리의 제이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인정한다면 당장 혼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흔적 중에서 어느 흔적이 가장 본상에 가까울까 하는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노력은 불가피하게 인간학이나 우주학으로 전락해 버린다.
2) 부정적 견해의 이유
(1) 바르트는 비유나 흔적을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체를 분명하게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제이의 기원을 추구하게 되며, 그 교리를 변명하고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2) 이것은 곧 성서가 증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다. 흔적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되면 가장 중요한 계시의 내용을 경시하게 된다. 문이 열려지면 그 문으로 존재의 유비가 들어온다. 계시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예화가 따른다. 이것은 계시를 경시하는 행동이다. 계시는 정당하게 해석될 것이지 예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3) 흔적에 대한 길고도 자세한 고찰 끝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즉 “이 흔적은 분명하고 의존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불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 교리의 범위 안에서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다.
(4) 그러나 흔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안에서의 피조자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지함에 있어서 우리는, ”제 1의 기원과 함께 제 2기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단 하나의 기원을 주장한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5) 바르트는 Vestigia Trinitatis의 발견자들이 계시와 나란히 3위 일체의 다른 제 2의 다른 뿌리를 만들어낼 의사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 다른 뿌리를 유일하고 참된 것으로 만들려고 했거나 3위 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려 했던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6) 바르트도 창조 안에 수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논쟁의 파트너였던 브룬너의 입장에 보다 가깝게 접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있어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 작은 빛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는 가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바르트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Vestigia에 의한 신학적 언어가 계시의 해석(interpretation)을 넘어서 계시의 예증(illustration)을 주장하는 경우의 위험한 상황을 계속 우려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해석이란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함을 의미하며 예증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해석은 본질이 변하지 않으나 예증은 본질이 변할 우려가 있다. 윙겔(E. Jüngel)은 해석은 계시가 인간의 말을 정복하는 것이고 예증은 인간의 말이 계기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바르트의 해석과 예증을 설명하고 있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