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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 논쟁<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브룬너)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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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와 브루너©고 유광웅 교수 제공 책자 사진

 

1. 자연에 대한 바르트의 관점

구약 신학자 폰 라드가 구속사에 집중한 것처럼 교의학에서도 창조보다 구속 교리에 집중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칼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자신은 모든 자연신학에 대한 적이다”라는 도전적 선포를 통해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에 대해 그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 바르트가 창조 교리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하게 이 부분을 다루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바르트는 4장으로 나누어 창조의 사역, 피조물,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 등을 다루고 있다.

이 가운데 3장에서 자연과 과학의 관련성에 대해 다룬다. 다만 여기서 자연과학적 질문들에 대해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적 문제점이나 목적 또는 도움이 성경과 교회의 창조 이해에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바르트가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은 신학적 진술인 점에서 근본적으로 자연과학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창조 교리가 방대한 분량의 해석학적 전망으로 전개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과학과 선험적(先驗的, a priori) 접촉이 없는 삼위일체적 전개요 계약(covenant)의 관점에서 창조의 문제를 다룬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제 3장 서문에서 미래에 기독교의 창조 교리가 자연과학과의 관계에서 많은 충돌과 문제점이 생길 수 있음을 예견한 것은 주목된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집중하지만 과학적 연구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신학과 과학 사이의 대화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에 적대적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일반적으로는 브루너와의 자연 신학 논쟁으로부터 바르트의 반 자연 신학적 경향을 추론하려는 경우가 많다.

2. 바르트와 안셀름

하지만 바르트는 브루너의 자연 신학에 대한 반론인 아니오!(Nein!)가 아니라 1931년 출판된 켄터베리의 안셀름의 하나님 증명에 관한 책으로부터 기독교 교리에 관한 철학적 즉 인간론적 근거와 해석의 잔재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바르트는 안셀름적 사고가 자연주의적이고 카톨릭적인 인식론으로 보아 자신의 신학적 틀과 이질적임을 알았다. 바르트에게 있어 믿음(fides)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회의 신앙 고백(creed)에 대한 지식이며 순종이었다. 복음의 진리는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승인된 신앙의 조항들(articula fidei)에 대한 순종으로서의 이해 모색이다. 그런데 신학을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로 파악하는 안셀름의 관점은 바르트에게는 수용할 수 없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바르트에게 계시의 역사란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그리스도와의 만남 사건만이 초월적인 하나님 계시의 현실적 표상일 뿐이다. 이 초월 계시 앞에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연과 이성은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다.

바르트가 볼 때 오늘날 창조과학 논쟁이나 지적 설계 논쟁, 교과서 진화론 논쟁 따위는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야 말로 Nein!인 것이다. 자연 계시에 대한 이 같은 반감은 브루너와의 자연 신학 논쟁으로 이어진 것은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자연신학 논쟁

개혁주의 두 신학자 바르트와 브루너가 자연 신학 논쟁을 벌인 것은 1934년이었다. 이 해 브루너는 <자연과 은총:칼 바르트와의 대화>(Natur und Gnade:Zum Gespräch mit Karl Barth)를 출간하였다. 브루너는 이 책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간직해 왔으며, 결코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계시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아무런 신적 접촉점이 없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건과 자연적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는 보편적인 특별한 지적, 이성적 능력이 있다.

브루너는 인간에게 동질성이라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유의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의 능력(a capacity for words, Wortmächtigkeit)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의 은총은 오직 믿는 이들에게만 그 능력(Capacity, Fähigkeit)이 임하며, 이 은총은 자연과 이성과 지성이라는 접촉점을 가지고 인간에게 접근한다.

비록 타락하여 죄의 영향 아래 있으나 인간은 이 능력을 상실하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브루너가 특별 계시를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창조 안에 나타난 계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브루너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점에 있어 바르트와 브루너는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너와 바르트가 갈라진 이유는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브루너는 타락하여 하나님과 소원해진 피조물 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재하신다고 본 것이다.

결국 10월 30일, 종교개혁 기념일에 출판된 <아니오!>에서 바르트는 브루너를 '타협의 선구자'라 공격하면서 자연신학을 질타하고 거부한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신학적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체계의 형성"으로 이해했다. 변증신학자요 초월을 믿는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바르트가 볼 때 자연신학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초월 계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 방법은 성경의 설명과도 전적으로 달랐다. 자연신학은 진정한 신학의 범위 안에 별개의 주제로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바르트는 신적 자기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계시를 전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자연을 의지하는 신학은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킨다. 즉 바르트는 공식적으로 자연신학을 별개의 신학 문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성경은 바르트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 자연신학”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가 생각하는 “그 자연신학”만 그렇다.

성경을 지지하는 자연신학은 왜 고려하지 않았을까? 즉 자연신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달리 해석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복음적 창조론오픈포럼이나 복음적 지적설계운동처럼 복음적 자연신학이라면 성경적 모색을 추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조심스럽게 길을 열 수 있다. 복음에 입각한 창조 신학이 아닌, “자연신학을 어떤 종교적 신념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해 종교적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공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한 윌리엄 앨스턴(William Alston)의 축소된 자연신학 개념이 자연신학 해석을 지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과연 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무시할만한 심각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확인이 신학을 파괴할 것이라는 믿음과 자연신학을 주장하면 신학이 인류학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영원한 소극적 두려움에 빠질 만큼 복음과 계시는 아주 힘이 부족한 도구에 불과하단 말인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그렇게도 이상스러운 복음의 괴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구속 교리에만 매달릴 때 사람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구속 교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썩어질 더러운 것들이요 복음에 방해만 될 뿐이고 자연 세계는 악하고 더럽고 구속에 아무 도움도 못되는 타락의 본보기에 불과하다고 매장해버린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질료적(material) 특성과 형상적(formal) 특성으로 구분하여 인간의 긍정적 측면을 보려고 노력하였다. 질료적 특성은 죄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형식적 형상은 소멸되지 않았다. 형식적 형상은 인간의 본질적 개념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죄인이든 아니든 하나의 주체자요, 합리성과 책임성을 지닌 존재이다. 형상적 특성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며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전제(前提)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또한 브루너는 은총과 자연도 불연속성의 관계가 아닌, 연속성의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한다. 따라서 브루너의 주장은 하나님의 자연 계시(일반 계시)가 있다는 것과 자연신학이 가능하다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이렇게 브루너는 바르트보다 조금 유연하게 복음의 접촉점(the point of contact)을 자연 계시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져 내려온 개혁신학과 심각하게 충돌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상하게도 이 문제만큼은 절대 양보가 없이 완강했던 것이다.

4. 바르트와 토렌스와 맥그라스 그리고 자연신학

그래서 제임스 바(James Barr)나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신학자들은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완강한 거부는 성경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현대 신학과 철학, 사회의 유행과 발전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특히 T. F. 토렌스는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바르트가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놓고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두 적수처럼 본다는 것이다. 토렌스는 자연신학을 계시신학의 적수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토렌스가 볼 때 자연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 식으로 이해된 자연신학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인 셈이다. 참된 자연신학은 계시의 밖이 아니라 계시의 보호아래 있어야 한다. 토마스 토렌스는 성경을 배제한 자연신학이 아닌 성경적 삼위일체 신앙 속에서 재구성된 자연신학이 참 신앙적 자연신학임을 분명하게 표방하여 복음적 자연신학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이것이야말로 18세기 발전하여 이신론(理神論)의 위험에 빠져버린 자연신학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참된 자연신학이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과학적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토렌스가 바르트 신학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과학에 대한 신뢰가 깊은 토렌스적인 모든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상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제된 이 같은 자연신학은 바르트적 전통이 아니라 어거스틴과 칼빈적 전통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적 물음과 신학적 물음이 모두 진정한 물음이라고 보고 과학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토렌스의 자연신학(과학적 신학 또는 신학적 과학, Theological Science)은 최근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자연신학(과학신학, Scientific Theology)으로 발전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 천재 신학자 맥그라스의 자연신학 도전(?)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는 차분하게 지켜볼 일이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