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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출애굽"은 언제였을까? 아멘호텝 2세? 라암셋 시대? 하트셉수트는 출애굽 2장의 바로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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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왕조, 기원전 1479- 1457 년경, 하트셉수트의 딸 네페루-레가 앞에 있는 세넨무트의 주사위 의자, 테베/카르나크, . 세넨무트는 고대 이집트의 고위 관리이자 신왕국의 건축가였다. 그는 통치 중인 여왕(파라오) 하트셉수트 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관리 중 한 명이었고 아마도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주요 건설 프로젝트를 책임졌을 것이다.©조은선

함의 후손 미스라임, 고대 애굽 문명을 이루다

애굽이라는 이름이 역사 기록에 보이는 것은 성경을 제외하면 기원전 8세기 경 호머의 오딧세이에 ‘아이굽토스’(Aiguptos)라는 명칭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말은 하 애굽(북 애굽)의 수도 멤피스의 일반적 명칭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하 애굽만을 지칭한 이 말은 상·하 애굽 전체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호 9:6; 사 19:13). 세상 기록에는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하나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 아브라함 시대부터 애굽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애굽 문명의 연대가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은 비옥한 나일강의 양쪽 주변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문명을 이루어 세계 초대 문명을 이루었다.

이 비옥한 땅에 미스라임 후손들과 셈의 후손 일부가 모여들었다. 그 셈의 일부 가운데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도 끼어 있었다. 상·하 애굽을 통일한 ‘나르멜'의 제 1왕조가 시작된 것은 주전 3200년경이었다. 애굽 역사학자 매네토의 구분에 따르면 구 왕국에 속하는 3-6대 왕조(주전 2690-2181) 시대에 이미 애굽은 피라밋 황금 시대를 맞는다. 애굽 문명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한 곳으로 알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연고팔레트, 제 5 왕조시대, 기원전 2445 - 2414년, 발견장소는 Abusir(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나일강 서쪽 기슭에 위치한 이집트의 마을이자 고고학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로 "오시리스의 집(예배 장소)"을 의미한다. 애굽이 아브라함 이전, 곧 고조선 설립(주전 2333년) 이전부터 이미 대단한 통치 체제를 갖춘 고대 문명임을 보여준다©조은선

 

미스라임 후손 중심의 이 지역에 셈족 후예인 힉소스 족이 침범하여 잠시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한 때는 제 2 중간기로 불려지는 제 13-17왕조(주전 1785-1570)때였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애굽은 이렇게 아브라함이 족장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이미 피라밋을 건설할 정도로 세속 문명이 발달한 대 왕국이었다.

성경은 애굽의 바로가 아브라함의 “심히 아리따운” 아내 사래에게 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14). 65세의 사래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애굽 왕이 반했던 걸까? 당시의 생태와 환경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사래는 127세를 살았다. 그렇다면 아마 당시 여생의 절반을 산 사래의 미모는 지금의 30-40대의 모습과 유사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뺏기지 않고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섭리) 덕분이었다.

애굽과 이스라엘 그리고 출애굽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애굽 문명을 일구어 번성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운명적 만남을 가지게 된다. 이 역사적 만남은 무엇보다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애굽 방문 이후 애굽에서 현달(顯達)한 요셉의 도움으로 야곱과 그 후손들은 비옥한 애굽 고센 땅에 정착하여 4세기 동안 애굽에서 살았다(창 15:13).

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파라오가 등장하면서 야곱 후손들은 시련에 처하고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 노예의 질곡(桎梏)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귀향 시키게 된다. 이 내용은 마귀의 지옥 권세에서 하나님 자녀들을 건지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모형(模型)이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도대체 언제쯤 애굽을 떠났던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애굽 제 18왕조 시대 :

아흐모세 1세(기원전 1567년 ~ 기원전 1546년)

아멘호텝 1세(기원전 1546 ~ 기원전 1526년)

투트모세 1세(기원전 1526년 ~ 기원전 1512년)

투트모세 2세(기원전 1512년 ~ 기원전 1504년)

하트셉수트(기원전 1503년 ~ 기원전 1482년)

투트모세 3세(기원전 1504년 ~ 기원전 1482년)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50년 ~ 기원전 1419, 1425년)

투트모세 4세(기원전 1400년 ~ 기원전 1390년)

아멘호텝 3세(기원전 1390년 ~ 기원전 1352년)

티예

아멘호텝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52년 ~ 기원전 1335년)

스멘크카레(기원전 1334년 ~ 기원전 1333년)

네프루네프루 아텐 (기원전 1333년 ~ 기원전 1331년)

투탕카멘(기원전 1331년 ~ 기원전 1332년)

아이(기원전 1322년 ~ 기원전 1318년)

호렘헤브(기원전 1318년 ~ 기원전 1304년)

먼저 제 18왕조(주전 1570-1293) 아멘호텝 2세(1450-1425, 19) 시대 전후로 보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된 것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4년(왕상 6:1)이었다. 이 시기는 주전 960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시기는 대략 주전 1440년 경이 된다.

파란색 왕관을 쓴 무덤 부조: 아멘호텝 3세. 제18왕조, 기원전 1360년경, 석회암©조은선/아멘호텝3세(Amenhotep III)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파라오이다.이집트가 가장 번성했던 시대의 왕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지배하였다. 당시는 히타이트·바빌로니아에서 여러 가지 산물이 수도 테베로 흘러들어 왔다.

사사 입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헤스본 일대를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삿 11:26)고 말한다. 입다 활동 연대는 주전 1100년 경이었다. 그렇다면 아멘호텝 2세의 시대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주장은 성경의 연대기와 잘 맞아 떨어져 보수적 성경학자들이 선호하는 견해이다.

세크메트 신 형상, 제 18왕조 시대, 기원전 1360년경, 테베, 이집트©조은선/하토르와 동일한 신격으로 숭배되었는데 주로 사자의 머리를 하고 태양을 정수리에 얹은 형상으로 묘사된다. 암소의 형상을 한 하토르일 때는 다산, 풍요, 행복 등을 상징하는 좋은 신이지만… 사자 머리를 한 세크메트로 변하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분노의 여신이 된다.

 

이와는 달리 제 19왕조(주전 1314-1194 또는 1293-1188) 라암셋 1세(1314-1312 또는 1293-1291) 또는 라암셋 2세(주전 1299-1232 또는 1279-1212/주: 앞의 연대가 좀 더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보수적 연대이고 뒤쪽의 연대는 세속 고고학에서 보는 연대임. 여기서는 주로 성경적 연대를 존중함) 시대로 보는 입장이 있다.

애굽에는 제 19대 왕조부터 제 20왕조 사이(약 주전 1314-1085)에 라암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11명의 왕이 있었다. 출애굽기에 모세 출생이전 국고성 라암셋 건축 이야기가 나오므로 모세의 출애굽을 자연스럽게 라암셋 성 건축 이후로 보는 견해이다.

이 중 성경의 라암셋을 67년을 통치했다고 알려져 있는 라암셋 2세로 보는 견해이다, 그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힛타이트 족과 전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즉위 21년에는 힛타이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나라가 공동으로 해양 세력과 맞서 싸우는 가하면 오늘날까지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부 심벨 신전과 카르낙 신전 그리고 라암셋 왕궁(출 1:11)등 많은 기념물을 건축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미이라(Mummy)가 남아있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동원된 국고성(國庫城) 라암셋 성은 당시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이 성은 이후 400여년 이상 존속되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갈 때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창 12:37; 민 33:3,5).

황금 데드마스크로 유명한 투탄카멘(기원전 1331년 ~ 기원전 1332년)은 아멘호텝 2세와 라암셋 2세 시대 중간에 잠시 통치한 소년왕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국고성 라암셋 건축이 라암셋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경우 국고성 건축은 모세가 태어나기 전인 라암셋 1세(3년 통치)나 세티 1세(23년 통치) 때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경우 출애굽은 라암셋 2세 때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 진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 였으므로 대략 주전 1314-1289년 사이, 즉 3년 내지 20여년 만에 모세가 80세가 되었다는 모순의 발생을 막으려면 라암셋 1세나 세티 1세가 아닌 라암셋 2세로 봄이 좀 더 성경에 접근할 수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결국 보수적 학자들이 아멘호텝 2세 전후를 출애굽 시기로 보는 반면 세속의 고고학 성과를 수용하는 학자들은 라암셋 시대 출애굽을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이 두 주장은 사사건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요단 동편 땅에는 주전 1900-1300년에 정착민들이 없었으므로 에돔 족속과 같은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람세스 시대 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반대하는 측은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주전 16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반박한다. 후기설의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1300년까지 ‘하솔’(Hazor)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솔이 두 번 멸망했다고 말한다. 1차 멸망은 여호수아에 의해서이고, 그 후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하솔을 무너뜨렸다(수 11:6-14; 수 19:36). 이후 솔로몬 왕은 하솔 성을 요새화하여 홀레 평원과 북방 지역을 지키는 요충지로 삼았다(왕상 9:15). 하솔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이 성읍이 1400년경에 멸망했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물론 출애굽의 시기에 대해 양측은 서로 입장을 전혀 양보하지 않고 팽팽히 맞서 있다.

19세기 말 애굽 테베(Thebes) 지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바로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의 발견이었다. 메르넵타(주전 1224-1214 또는 1212-1202)는 라암셋 2세의 아들로 그를 이어 애굽 파라오가 된 인물이었다.

검은 화강암에 상형문자들로 가득한 높이 2미터가 조금 넘는 이 석비는 주로 애굽 파라오 메르넵타가 리비아를 공격할 때 탈취했던 노략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마지막에 놀랍게도 파라오 메르넵타가 이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성경을 제외한 문헌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씨(후예)는 이제 없다. 후르(지금의 시리아)는 애굽을 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주전 1215년(또는 1207)이며 메르넵타의 가나안 침략은 주전 1220년(또는 1212)년 일어났다. 메르넵타 시대 가나안 땅에 애굽 파라오가 맞서 싸우고 그 전쟁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정치적 이스라엘 세력이 존재했다는 언급은 아무래도 라암셋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다는 주장에 불리한 고고학 자료라고 볼 수 있겠다.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에서 수몰 당한 애굽 군대가 곧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추적해 와서 정복했다는 것은 성경 기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르넵타의 가나안 원정과 이스라엘과의 전투는 출애굽 이후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시대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황금 미이라 두상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왕(주전 1334-1325)은 제 18왕조 후기의 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투탕카멘 왕 즉위 약 10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성경적으로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보여 진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에 도착한 것은 주전 450년 무렵이었다. 특별히 헤로도투스는 애굽인들의 일상생활, 종교생활, 풍습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1천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은 성경을 제외하고 검증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작업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제 18왕조 시 출애굽설을 지지한다. 하지만 앞의 두 주장은 모두 성경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 팽팽한 두 입장 가운데 어떤 주장이 더 타당한지는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더 지켜보기로 하자.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