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해석과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김병훈교수, 합신 조직신학)
논펑자: 허정윤 박사 (알파와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기독교 학술원)
허정윤 박사
이 논평은 김병훈의 글 “팀 켈러의 유신 진화론과 창세기 해석의 문제”를 고찰한 것이다. 김병훈은 현재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이고, 창조론 분야에서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의 최근 저서는 『성경적 창조론이 답이다』(공저자: 한윤봉)이 있다. 김병훈은 이번 그의 글에서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을 하는 유명한 팀 켈러 목사에 대해 순전한 복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김병훈은 켈러를 유신 진화론자로 못박고 있으나, 켈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신 진화론 관점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런 사실은 김병훈이 자료로 사용한 켈러의 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켈러는 ‘데릭 키드너 모델’ 지지자이다. 켈러는 ‘키드너 모델’이 유신 진화론과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을 혼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켈러의 관점은 데릭 키드너의 창세기 주석을 모델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줄여서 ‘생진과’)을 사용하여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1. 켈러의 문제 인식은 무엇인가?
김병훈은 켈러가 정통 신앙과 진화 생물학 사이의 양립 불가능한 갈등 상황을 “과장된 그림일 뿐”으로 인식하고 있음과 “하나님이 진화 과정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체들과 인간 생명을 창조해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음이 문제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김병훈은 켈러의 문제 인식을 비판하기 위하여 유신 진화론자 브루스 월키의 “나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데이터가 압도적일 경우, 이러한 현실을 부정한다면 ......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또한 맹목적인 신앙이 될 것”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켈러의 문제 인식은, 윌리암 슈바이처가 판단한 것처럼 월키가 말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창조를 창세기 해석의 차이를 넘어 본문과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므로 비판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2. 켈러의 문제 해법은 정단한가?
김병훈은 켈러가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많은 주장들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고려하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지적한다. (각주를 보면 “많은 주장들”의 자료에는 국내 자료 2건이 포함되어 있는데, 김병훈 자신의 최근 저작도 들어 있다). 그리고 진화론은 아직 과학적으로 확증되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과학적 판단을 극복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김병훈은 그러한 진화론 가설에 의지하여 “신앙과 진하의 갈등”을 “결코 화해할 수 없지 않다는 켈러의 생각”은 ‘상보성 모델’과 비슷한 잘못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멜빈 팅커가 인용한 도널드 멕케이의 글을 인용한다. “신이 허락한 과학의 발견은 신의 말씀과 모순될 수 없다.....모순된다면......우리가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이어서 김병훈은 “상보성 모델은 과학적 발견이 성경의 말씀의 해석보다 우선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멕케이가 한 말은 옳고, 김병훈의 말은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상보성 모델’은 양자 물리학 용어인 ‘상보성 원리’를 쉽게 부르는 말이다. 1920년대가 끝나가는 무렵에 양자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가 처음으로 전자를 관찰하고, 입자와 파동의 두 가지 물리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제안했다. 닐스 보어(Niels Bore)가 전자는 관찰자에 따라 입자로 보이기도 하고, 파동으로 보이기도 하는 상호보완적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공존한다는 뜻)을 내놓는다. 이를 계기로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양자 물리학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실재 논쟁’이 벌어졌다. 과학사에서 유명한 이 논쟁에서 보어는 ‘보이진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을 양자 물리학계에서 퇴출시켰다. 그리고 하이젠베르그(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주장(상보성 원리)은 양자 물리학의 지침서인 코펜하겐 해석에 모두 반영되었다(논평자의 『과학과 신의 전쟁』, p.300 ‘코펜하겐 해석’을 보라).
‘상보성 모델’은 성경과 과학을 각각 지지하는 두 진영이, 앞에서 멕케인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의 진리만을 세우려는 갈등 구조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자기 주장을 두고 서로 논쟁하는 양측은 ‘상보성 모델’이 의미하는 바의 공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화론 일부를 창조론에 덧씌워 넣으려는 켈러의 시도를 ‘상보성 모델’과 비슷하다는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김병훈이 각각 양보 없는 해석의 논쟁에서 “상보성 모델은 과학적 발견이 성경의 말씀의 해석보다 우선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해 부족까지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반박을 받을 것이 우려된다. 학문적 논쟁에서는 사실적 데이터를 더 많이 확보하는 측이 승자가 된다. ‘상보성 모델’은 양쪽의 주장이 다 사실이고, 이중적 공존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이다. 과학과 신의 말씀 어느 쪽에 모순이 발견되어도 공존 또는 타협을 택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상보성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야 한다. 논평자는 켈러가 진화론을 과학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비록 일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에 덧씌우려는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동시에 존 프레임을 인용하여 진화론을 가설로 보는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려는 김병훈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만 김벼훈이 모어랜드를 인용하여 유신 진화론은 “교회의 무덤을 파는 것들”이라고 경고 메시지는 올바르다.
3. ‘생물학적 과정인 진화’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 이론인 진화 철학’을 함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켈러는 ‘생진과’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 이론인 진화 철학’(켈러의 ‘거대한 모든 것의 이론’, 줄여서 ‘거모이’)을 함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켈러는 로마 가톨릭 등, 많은 크리스천이 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훈은 켈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유신 진화론자 우종학의 진화에 대한 개념 설명을 인용한다. 우종학은 진화론을 구분해서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로 이해한다. 김병훈은 우종학의 ‘진화’와 ‘진화 이론’ 개념이 켈러의 ‘생진과’ 개념에 모두 포함되고, ‘진화주의’는 ‘거모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김병훈은 이어서 켈러와 우종학의 진화론 설명에 대해 창조론자와 진화론자에게 질문을 던져서 그들의 답에 그의 해석을 덧붙여 그의 개념 구분의 근거 자료로 삼는다. 그런 방식은 그와 한윤봉 (『성경적 창조론이 답이다』의 공저자) 전매특허적 방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구분의 방식은 양쪽에서 뻔한 답이 나올 뿐, 논증이나 반박의 자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본다.
켈러의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두 개의 진화 개념 구분에서 경계선이 어디냐를 정하는 것이며, 둘째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생진과’는 믿고, 무신론적인 ‘거모이’는 믿지 않는 것을 가르는 확실한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김병훈은 첫째 문제에 대해 스티븐 마이어, 프란시스 아얄라, 자크 모노 등의 주장들을 인용하고, 마지막에는 에른스트 마이어가 현대 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자는 칼 마르크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등이 아니라, 바로 다윈이라고 평가했다고 지적한다. 김병훈은 그들이 “진화론을 믿는 자에게 무신론적 또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영향력을 미치게 됨을 잘 말해준다”고 말한다. 김병훈은 개념의 구별을 시도하는 것이 “유신 진화론자의 희망”이라고 하면서, 우종학이나 켈러가 개념의 구별을 시도한 것은 진화론을 인정하더라도 ‘거모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하지만 과학은 신의 존재 유무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을 인정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 문제에 대한 김병훈의 답은 “진화론을 지키기 위하여 성경의 해석을 휘젓고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무너뜨리는 커다란 대가를 치루어야만”하지만, 그래도 유신 진화론은 무신론까지 믿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김병훈은 두 문제에 대해 유신 진화론자는 “과연 과학시대에 성도를 보호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말로 묶어서 질문으로 대답을 가름하는 것 같다. 김병훈이 한 앞의 말의 의미는 진화를 과학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로는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켈러의 주장에 긍정하는 것인지, 반박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논평자는 김병훈이 다루지 앟는 켈러의 진술과 김병훈의 대답을 짧게 비교해보려고 한다. 김병훈이 사용한 자료 중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에서 켈러는 ‘생진과’를 믿으면, 앨비 플랜팅거(Alvin Plantinga)의 ‘영속적 자연주의’까지 자동적으로 믿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켈러는 그것을 신 무신론(New Atheism)자의 신념과 같은 관점이라고 본다. 켈러는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말하는 ‘개연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사회에서 신 무신론을 믿는 자들은 반대자들이 공적으로 개인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 도태시키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염려한다. 켈러는 여기서 특별창조론을 믿는 평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생진과’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어도 ‘거모이’를 안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엩킨슨 David Atkinson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구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특별창조론을 믿는 평신도들과 ‘생진과’를 믿는 신자들이 신 무신론자들을 논박하고 몰아내야 한다는 공통적 과제를 제안한다. 그 제안에서 켈러가 가장 중요시하는 점은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양측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 상태를 줄일 수 있기도 하지만, 더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평신도들에게 ‘생진과’와 ‘거모이’를 구분하게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논평자는 켈러가 신 무신론자들을 몰아내는 일을 “공통적 과제”로 하자는 제안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과제를 이용하여 ‘생진과’를 믿게 하려는 의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켈러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더 늘어놓지만, 순전한 복음주의 설교자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있음은 숨길 수 없다. 켈러와 김병훈 두 사람의 문제 인식과 대답을 비교해보면서 논평자는 김병훈의 대답은 해결의 방향에서 벗어나 있고, 방법의 평가나 대안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4. 찰세기 1장은 역사적 서술이 아닌가?
켈러는 “창조, 진화, 그리고 평신도들”이라는 기고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에서 ‘생진과’를 사용하셨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에 따른 우려를 제시했다. (1) 성경의 권위(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는문제), (2) 생물학(생물학적 과정의 진화)과 철학(리차드 도킨스 Richrd Dawkins처럼 철학적 질문까지 거의 모든 것을 자연선택으로 설명하는 진화)의 혼동, (3)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아담과의 관계에서 온 우리의 죄성), 그리고 여기(3)에 폭력과 악 문제(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이 가져온 폭력과 죽음의 고통)를 추가해서 다루었다. 이것들은 켈러의 글에서 다뤄진 3대 문제이다. 그런데 김병훈은 이제까지 켈러의 문제 (2)를 다루었고, 이제 문제 (1)로 들어간다.
김병훈은 켈러가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하고, 역사적 서술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지적한다. 켈러는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데이비드 영이 “고양된 준-시적 언어로 기록”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켈러는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존 콜린스를 더 끌어들여 창세기 1장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읽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병훈은 켈러의 주장과 반대로 영이 창세기 1장은 “틀림없는 역사서이기 때문에 족보(역대)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고 이어서 말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김병훈은 찰스 핫지의 창세기 1장 해석의 3가지 틀을 인용하여 켈러에 대한 비판을 강화한다. 핫지는 ⓵ 역사적 해석, ② 알레고리적 해석, ③ 신비적 해석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⓵ 역사적 해석을 지지했다.
5.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2개의 창조 기사인가?
김병훈은 켈러의 문제 (1)에 속하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이해 문제를 계속 논의한다. 켈러는 창세기 1장과 2장 모두를 역사적 기록으로 읽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켈러는 2장의 창조 순서가 자연적 질서를 규준으로 삼고 있으므로 1장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역사적 기록으로 믿을 수 없는 이유는 1장에서 제1일의 빛이 제4일의 빛의 근원인 태양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과 비가 오기도 전에 제3일에 식물이 창조되었다는 두 가지 창조의 순서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병훈은 그의 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김병훈은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24시간 6일 동안에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켈러의 말을 인용해놓고, 영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영은 2장 4절에서 사용된 “이것이 내력(eleh toledoth) 이니”라는 말의 용례를 보여주고, 이 말은 2장 5절부터 아담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병훈은 영과 같은 ‘엘레 톨레도트’의 해석을 근거로 루이스 벌코프 역시 창세기 2장이 하나님이 6일 창조와 안식까지 마친 다음에 이어서 “사람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연대기적 순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김병훈은 창조주의 이름이 바뀐 창세기 2장 4절부터 “기술하는 목적과 관점”이 바뀌었음을 말한다. 김병훈은 이어서 “엘로힘이신 하나님의 능력의 창조를 보이는 관점에서 이제는 여호와 엘로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 되시는 역사의 전개를 풀어가는 관점으로 전개되어 간다”면서 그의 질문에 대해 그의 대답을 마무리한다. 논평자는 김병훈의 대답에서 창세기 1, 2장이 같은 창조를 이어가는 하나의 기사라는 뜻인지, 서로 다른 별개의 기사라는 뜻 인지, 구별하지 못하겠다.
6. 결론
-김병훈의 결론
여기서 결론을 맺으려는 김병훈의 글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켈러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김병훈의 결론을 보자. 첫째, 켈러는 창세기 첫 두 장을 유신 지화론에 잘 어울리게 재해석한 것을 제시한다. 둘째, 켈러는 진화론과 창조론과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 처방으로 ‘생진과’를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셋째, 김병훈은 진화론을 인정했을 때, 따라오는 문제들-성경 해석의 문제(특히 창세기 1 2장), 3장에서 일어난 아담의 타락(원죄),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 등-을 열거하고, 켈러에게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는다. 넷째, 김병훈은 벌코프가 그의 조직신학 창조론 편을 마무리하면서 “유신 진화론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내린 결론이 올바른 결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그의 결론으로 대신한다.
논평자의 보충적 결론
논평자는 논평의 결론으로 김병훈의 글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김병훈은 그가 쓴 이 글의 5장에서 켈러의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24시간 6일 동안에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했다. 켈러의 이 말은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김병훈의 『성경적 장조론이 답이다』의 관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켈러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먼저 본문에 충실하고, 영감된 창세기 저자의 의미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켈러는 그의 ‘생진과’를 수용하게 할 목적에서 진화론에서 요구되는 오랜 연대를 에둘러 주장한 것이다. 논평자는 켈러의 주장을 바로 논평한다. 창 2:17과 시 90:4의 본문은 ‘젊은 지구론’의 바탕인 창조 6일의 하루 24시간 해석을 불허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24시간 안에 죽지 않고 930세를 넘게 살았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썼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에 쓰신 하루의 시간을 인간 세상에서 쓰는 24시간의 하루와 같다고만 해석할 수 있을까?. 논평자는 하나님의 창조 6일의 하루 하루의 시간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본다. 이는 켈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지구론’만 고집하는 ‘성경적 창조론’의 태도를 성경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켈러는 그리스도인 평신도들에게 ‘생진과’를 수용했을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질문하고 수집해서 그것들을 3개의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정리해서 대답했다(“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 논평자는 켈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켈러가 그의 글을 비교적 성실하게 썼다는 점을 인정한다. 김병훈도 이 글을 시작하면서 켈러의 이 글을 자료로 사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김병훈이 그의 글의 결론에서 지적한 “진화론을 인정했을 때 따라오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켈러는 그의 글 (질문 3과 대답)에서 성실하게 거의 다루고 있다. 켈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려뿐이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김병훈은 그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켈러에게 되묻고 있다. 김병훈은 그가 말한 켈러의 글을 자료로 사용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김병훈의 학자적 양식이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까지 해야 할 지경이다. 논평자는 그리스도인에게 진화론이 초래하는 고난은 치열한 논쟁을 거쳐야 극복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몸소 겪어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성실한 태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논평 글: 허정윤 박사(『과학과 신의 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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