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과 분류학의 아버지 존 레이(하나님을 믿은 위대한 과학자들)
크리스천 과학자 존 레이와 칼 폰 린네
존 레이©위키피디아
식물학과 분류학의 아버지 두 사람, 존 레이와 린네
그렇다!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목사 아들이었고 한 사람은 신학을 공부한 설교자였다. 목사 아들은 필자가 과거 상세히 다룬 적이 있었던 식물학의 아버지요 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폰 린네(1707-1778)였고 또 한 사람은 영국 박물학의 아버지, 영국의 아리스토텔레스, 식물학의 원조로 불리는 존 레이(1627-1705)였다.
오늘날 분류학은 진화론의 도구처럼 되어 있으나, 실은 분류학의 아버지인 린네와 존 레이는 다윈의 진화론(『종의 기원』, 1859) 이전 사람들이었다. 즉 레이는 17세기, 린네는 18세기, 다윈은 19세기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윈 이전 이들 두 식물학자들이 진화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졌는지 논란이 많다. 진화론에 긍정적이었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신앙이나 학문은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니라 일정한 성숙기를 거치며 진행된다. 그런 과정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 이들 두 학자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칼 폰 린네©프랑크푸르트 자연사박물관
진화론의 원조는 찰스 다윈인가?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을 거론한 인물은 많았다. 다윈의 조부 에라스무스 다윈이 바로 진화론자였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의사요 시인이며 물리학자로 <주노미아>(Zoonomia,1794-1796)라는 동물 생리학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 책은 환경에 대한 동물의 능동적 반응에 관해 다룬 책으로 이것은 훗날 적자생존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이론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었다. 찰스 다윈이 할아버지로부터 진화에 관한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양 철학에서 일찌감치 시작된 진화 사상
고대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이오니아 밀레투스의 3대 (자연)철학자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에게서도 우연과 진화에 대한 사변적인 생각들이 있었다. 초기 철학을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자연철학(Physica)이라 부르는 것도 이들이 일종의 우주론, 기원론 학자의 원조라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초기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의 움직임(변화, Change)이었던 것이다.
탈레스(Thales of Miletus, 주전 624경-545경)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하여 처음으로 물이 변화하는 현상을 조물주의 개입 없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액체에서 기체로 또는 고체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에는 신이 부여한 생명력이 이미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애굽을 여행하는 길에 나일강의 진흙에서 작은 생물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주전 610-546)는 만물이 어떤 근원적인 실체로부터 유래했지만, 다시 변화하여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만물의 기원을 이 무한정자(apeiron)를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또 다른 밀레투스 철학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주전 585-528)는 공기(Pneuma)가 만물의 근원이라 주장했다. 그는 영혼도 공기이며, 공기가 탁해지면 물질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도 변화와 관련된 사유였다. 진화도 바로 변이에 대한 설명이다.
이오니아학파(Ionian School)로 불리는 이들 세 사람의 주장이 유신론을 정면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고는 물질 자체에 이미 조물주의 생명력이 주입되어 있다고 하는 생기론(生起論) 또는 물활론(物活論)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 같은 사고는 범신론의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관찰의 방법에 의해 자연적 발생을 주장한 것이기에 최초의 자연발생론(spontaneous generation)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철학의 원조들을 자연철학자 부른다. 유물론자들이 이들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유물론의 창시자로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가 로고스(이법, 이성)에 의해 작동된다고 여겼던 또 다른 고대 헬라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주전 504-433)는 생명체는 보다 고등한 생명체로 서서히 변화하고, 식물은 동물보다 먼저 출현했으며, 보다 덜 적응된 형태는 잘 적응된 형태로 대치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스의 로고스는 당연히 성경의 로고스(말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형적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아덴(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하며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종교성이 많다고 접근한 것이나 폐허화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제우스 신전은 이들의 종교성을 보여준다. 즉 헬라는 전형적 무신론 사회가 아닌 신화적 신들을 가진 다신론 문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서양 철학을 종합·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도 생명은 자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 철학자였다. 그런데 자연은 사다리(ladder of nature)의 연속체로 비 생물로부터 식물, 하등동물, 고등동물 그리고 결국 인류로까지 이르는 연속체로 절대적인 신이 부여한 힘에 따르는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참 된 창조주를 알았다기보다 일종의 물활론적, 목적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윈 이전의 생물진화론
다윈 이전 일반적 생물진화론을 구상한 사람으로는 라마르크 이전 마우퍼튜스(Maupertuis, 모페르튀이Pierre-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도 있었다.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문학가였던 그는 한 가정의 4세대에 걸친 가계도 연구를 통해 다지증(polydactyly)의 유전물질이 입자이며 한 가정의 부모를 통해 자손에 전달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이의 특성이 엄마와 아빠에게서 받은 입자에 의해 발현된다는 일종의 범생설(pangenesis theoly)이었다.
생물학과 과학사회학의 저명한 사학자인 피터 바울러(Peter J. Bowler, 1944~)는 유전에 관한 연구, 인간 인종의 자연적 기원, 그리고 생명체 모양이 시간에 따라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우퍼튜스의 공로로 인정하고 있다.
마우퍼튜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주에 대해 회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정통 생물학자 반열에 오른 인물은 아니었으나 찰스 다윈도 신학과 의학의 1년 정도 기초를 공부한 것이 정식 학업의 전부였으니 마우퍼튜스의 관찰도 다윈 수준의 학자로서의 범주와 역할을 한 인물이라 볼 수 있겠다.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 1:9) 했다. 이렇게 한 이론에도 다양한 사람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이론이 타당한 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 하겠다.
레이와 린네와 박물학자
린네는 식물학의 원조로 잘 알려져 있으나 존 레이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학문에도 일정한 연속성이 있다. 린네 이전에도 분명 식물학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존 레이였다.
본격적인 자연과학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도 과학자들은 당연히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자연철학자 혹은 박물학자들(Naturalists)이라 불렀다. 최근 독일은 베를린 “박물관 섬”에 훔볼트를 기리는 훔볼트 박물관을 개장하였다. 훔볼트는 두 사람을 말한다. 베를린 훔볼트 대 설립자인 칼 빌헬름 훔볼트(1767-1835)와 그의 동생으로 자연지리학ㆍ기후학ㆍ풍경학ㆍ해양학 등 다양한 학문의 길을 연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대표적 박물학자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이 고도화되기 이전 특별한 천재들은 이렇게 다양한 학문의 선구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존 레이도 그랬다. 그가 생물학계의 뉴턴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뉴턴이 물리 세계의 길과 질서를 정리했다면, 레이는 자연 세계의 학문적 질서의 길을 닦았다. 분류학과 식물학의 두 원조 중 린네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상세히 다룬 적이 있기에 본고에서는 존 레이의 학문과 신앙을 살펴보려 한다.
레이 학문의 배경
레이는 1627년 11월 29일 영국 에섹스의 블랙 노틀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장이로 지역의 토박이였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약초 전문가로 마을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식물을 사용한 일종의 민간 치료사였다. 레이의 시골 체험은 분명 어머니와 닿아 있다.
하지만 시골 소년 레이의 신앙과 총명함을 눈 여겨 보고 학문의 길로 인도한 것은 블랙 노틀리의 교구 목사들이었다. 레이는 이들 덕분에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를 배울 수 있는 브레인트리의 고전문법학교(우리의 중고등 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천재 레이가 모든 과학 저술을 라틴어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이다.
브레인트리에서도 레이는 그곳 교구 목사의 눈에 띄었는데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었다. 레이가 만 16세 6개월이었던 1644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식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케임브리지로 진학하는 데도 그의 도움이 작용하였다. 가난한 레이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칼리지 중 하나인 캐서린 홀(지금의 세인트캐서린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배우게 된다. 즉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 가능성이 있는 가난한 학자와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이다. 다시 그는 수학과 언어학을 중시하는 트리니티 칼리지로 전학해 1648년 학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 부임한다.
레이 시절(17세기)의 영국 정치와 종교<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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