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다른 민족인가요?
그렇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다른 민족입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된 이후, 우크라이나 수도 이름이 키예프에서 키이우로 바뀐 것도 그 같은 언어적 상이성을 반영합니다.
우크라이나(스키타이)의 조상은 성경 야벳 후손 마곡인 반면, 러시아 조상은 야벳의 후손인 메섹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는 루마니아와 더불어 스키타이족 후예라는 점에서
한민족과 더 친연성을 가진다고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필자가 쓴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편집자 주-
우크라이나(마곡, 스키타이)와 러시아(메섹)가 다른 민족인 이유, 우크라이나(스키타이)와 우리 민족은 닮았나?
헝가리 수도 부다 방면의 한 언덕을 오르다 보면 뜻밖에도 헝가리가 아닌 우크라이나가 자랑하는 작가이자 시인이요 화가인 타라스 세우첸코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의 토대와 현대 우크라이나어 확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100 흐리우냐 지폐에는 타라스 셰우첸코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 사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국가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조덕영
러시아는 대국이다. 영토 대국이요 자원이 풍부한 국가임은 맞다. 하지만 인구는 그렇지 않다. 일본보다 겨우(?) 1,500만명 정도 많을 뿐이다. 파키스탄보다는 1억명이 적고,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보다는 1억 4천여만명 정도가 적다. 대한민국보다 인구가 7천만명 가까이 많은 일본을 인구 대국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영토 대국일뿐 미국보다 인구 약 2억명이 적은 러시아가 인구 대국은 아닌 것이다.
영토나 인구가 전쟁에 절대적 요소라면 우리 민족은 아마 중국에 수십번 멸망했을 것이다. 세계를 평정한 원(몽골)은 한반도 중원(현 충주)땅에서 별류잡초, 노비들이 중심된 고려군에 패배한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개시 3년이 다가오도록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그리 만만한 국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촉발된 두 국가의 전쟁이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들은 두 국가의 국력 차이가 심하기에 우크라이나가 곧 굴복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 개시 2년 반이 지나도록 팽팽한 전세는 여전하다.
우크라이나는 과연 어떤 나라길래 이렇게 만만한 국가가 아닌 것일까? 우크라이나 민족은 러시아족과 달랐다. 우크라이나의 원조는 바로 인류 역사 속 가장 기동력이 뛰어나고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스키타이(마곡족)였다. 이 마곡족은 누구였을까? 우리 민족과도 닮았을까?
마곡은 누구인가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의 이름은 ‘곡의 장소’란 뜻이다. 즉 마곡은 문자적으로는 곡(Gog)이 최고 통치자로 다스리던 땅(혹은 백성)을 말한다(겔 38:2; 39:6). 마곡(Magog, 창 10:2; 대상 1:5)은 성경 안에서 그 혈통 계보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에스겔서를 참조할 때 마곡은 분명 곡(Gog)과 연관되며(겔 39: 6; 계 20:8), 한 통치자(주된 왕, 겔 38: 2, 미국 표준역 ASV) 밑에서 야벳의 다른 후손 메섹과 두발(지금의 터키 북동쪽 앗수르인의 영토였던 무쉬쿠와 타발)과 연합했다는 사실(겔 27:13)은 마곡이 북방의 야만 민족이 되었음을 말해준다(겔 38:15, 39:2). 사실 인간의 죄성 아래 야만적이지 않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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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지역에서 출토된 황금 빗.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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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가 된 마곡족
전통적으로 마곡족은 요세푸스의 기록(요세푸스, Ant Ⅰ. 6. 1, 123)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이 되었다. 또한 성경적으로는 많은 학자들이 성경의 마곡과 곡을 동일한 민족으로 간주한다.
요세푸스는 북방(겔 38:15, 39:2)에 살던 사람들을 ‘Magogites’라 불렸는데, 헬라 사람들은 이들을 스키티안(Scythians, 스키타이인들)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요세푸스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주전 484?-425?)의 책(Histories)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에 대해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nomad)’이고, ‘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이며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짐을 직접 끌고 다닌다’고 썼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의하면, 지금의 루마니아(Romania)와 우크라이나(Ukraine)를 포함한 지역의 고대 이름도 스키티아(수구디아, Scythia), 곧 스키타이였다.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족은 아라랏 북방으로 갔으며, 일찌감치 유라시아 대평원의 기마 유목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방으로 간 이들 마곡족은 주전 1200-700년경 볼가강 하류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제로는 구덩고분에서 지하횡혈(굴)고분 그리고 후기덧널무덤(목곽분)의 묘제를 가졌던 것을 밝혀냈다.
유목민들은 언어는 있었으나 정착 문화가 아닌 탓에 고유 문자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유물과 일부 기록에 의지해 그 문화와 문명을 집작해볼 수밖에 없다.
천막에 살며 소와 말을 목축하던 이들은 기동력을 활용하여 주변 문화와 밀접하게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주변 문물도 일부 활용하였을 것이다.
주전 4세기 만들어진 스키타이 귀족의 거대한 고분에서 여자, 노예, 말 등의 순장 물품이 발굴되어 이들의 습속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금, 은, 동 단지와 장신구 그리고 스키타이 특유의 청동솥(동복)과 토기들이 발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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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했던 스키타이 황금문명전.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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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마곡 후손)를 닮은 우리 민족
주전 5세기 이미 역사가 헤로도토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마곡 후손 스키타이족의 기마 유목민들은 동유럽, 터키 아나톨리아,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과 만주까지 이르러 다양한 초원의 제국들을 건설한다.
이들은 스키타이뿐 아니라 흉노와 훈, 돌궐, 위구르, 토번, 투르크, 선비, 티무르, 무굴, 거란(요), 여진(금), 원(몽골), 후금(청) 등의 제국을 이루었다. 이 초원의 땅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그야말로 비단길이요 동서 문명의 교통로였다.
이렇게 이들은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터키, 그리고 한반도 남부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하여 세계 최초로 글로벌화된 민족을 이루었다. 우리 민족도 당연히 이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야벳의 장자, 고멜족을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남쪽(지금의 서남 터어키 방향)으로 밀어낸 민족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것도 이들이요, 동유럽 토착민들이 두려움의 대상인 드라큐라 전설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 스키타이 민족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후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한 이후 140여 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스키타이를 이란인들은 ‘사카’, 인도인은 ‘샤카’, 중국인은 ‘새(塞)’라고 불렀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같은 유목민인 흉노(匈奴)나 훈족(Hun)도 결국 스키타이 계열이라 볼 수 있다.
즉 마곡족의 후손 스키타이족은 유목민의 원조요 흉노는 스키타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그 스키타이의 유목·기마민족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에 있어, 최근 사학자들은 스키타이 영향을 수용하려는 쪽과 만주·발해만 유역의 고조선에 국한하려는 두 입장으로 나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한국 고고학의 원조 중 한 분인 김원룡 박사는 <한국 고미술의 이해>에서 한국 청동기 문화의 특징 중 동물의 뒤틀린 몸이나 서로 싸우는 모습은 스키타이 동물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했다. 하지만 만주 고조선 영역에서도 이 같은 유물이 나온다는 점을 들어, 스키타이 영향을 축소하려는 경향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스키타이 황금전’이나 ‘고대 한국문화에 영향을 미친 북방 초원문화유산- 스키타이 황금전(1991)’이라는 전시 도록(圖錄)도 신라의 황금 문화와 연계시키기 위한 기획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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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가야에서 나온 스키타이 관련 유물인 동복. ⓒ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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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족(마곡족)과 우리 고대 역사
과거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는 이상한 신화가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들었다.
아마 만주와 산동반도 그리고 상하이 등 중국 동부 해안에서 직접 유입된 도래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남아로부터 해안을 따라 유입된 사람들도 있었다. 즉 한반도는 다양한 외래인들의 문화가 융합한 용광로였던 셈이다.
송파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의 4세기 13대 근초고왕을 소개하면서, "백제를 해양왕국이요 다양한 외국인들이 찾아온 글로벌 다문화국가를 이끈 위대한 군주였다"고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문제는 우리 민족 주류를 형성한 왕족과 귀족들이 어디서 왔는 가이다. 고대 사회는 지금보다 더한 철저한 신분 차별 사회였다. 문자도 아무나 배우는 것이 아니요 함부로 귀족도 될 수 없었던 사회였다.
한반도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의 <문무왕릉 비문>에 보면, ‘투후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이란 구절이 있다. 여기서 ‘투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서 한(漢) 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이 하늘(신)을 섬기던 김일제의 혈통(후손)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경주지역 신라 김씨 왕가의 김알지 후손들은 자신들을 흉노계인 김일손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에도 중국에서 꾸준하게 발견되고 있는 신라 출신 김씨들의 당대(唐代) 묘비석에 보면 자신들이 흉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음을 보게 된다.
흉노족들이 유목민이므로 정착 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성곽을 만들어 농사를 지은 사람도 다수 존재했으며, 특히 그들의 유적에서는 과거 한반도 북동 지역 옥저(沃沮) 사람들이 발명했다고 알려진 온돌(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일부 흉노 문화는 우리 땅에 정착하고 우리 민족에 동화되었다.
본래 신라 건국자는 박씨 성을 가진 혁거세(赫居世)였다. 신라 초기 왕호(王號)요 군장, 제사장을 나타내는 거서간(居西干)은 몽골의 게세르(keser) 영웅 서사시에 등장하는 ‘게세르 칸’과 언어학적으로 연관된다.
변한 지역에 존재하던 귀틀집의 기원도 한반도가 아니라 바이칼 호와 알타이 지방 및 애니세이 강 유역이라는 것은 역사적 정설이다.
가야 통치 지역이던 김해 대성동과 양동 고분에서 출토된 솥인 동복(銅鍑)과 철복(鐵鍑) 3개는 모두 북방 기마민족(스키타이 계열)이 사용하던 것들과 용도와 제법에 있어 동일한 것들이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 즉위년에 (고)조선 유민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거주하여 6촌(이, 최, 정, 손, 배, 설씨 촌)을 이루었다” 하여 신라 기원을 고조선 유민들의 이주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신라 총 56대 992년(B.C. 57-A.D. 935) 동안 박씨 성을 가진 왕은 10명, 석씨가 8명, 김씨 성을 가진 왕들이 38명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주로 박씨와 석씨가 왕위에 올랐으며, 김씨들이 왕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7대 내물왕과 19대 눌지왕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왕호도 거서간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뀐다(삼국사기는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 4대,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로 봄). 마립간은 임금이 있는 곳, 곧 강력한 통치자를 지칭한다.
왕호까지 바뀐 것에서 박씨와 석씨를 능가하는 강력한 북방 세력이 어느 시기 남하하였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분명 스키타이(흉노)의 피를 받은 무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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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김해)가야에서 나온 스키타이 관련 유물인 동복 관련 신문 보도. ⓒ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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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은 농경민족이 아닌 본래 유목민들이 소중히 여기던 금속이었다. 즉 신라 금관도 초원을 달리던 스키타이와 흉노의 유물인 것이다.
최초 금관이 출토된 곳은 남러시아 초원의 사르마트족 묘에서 출토된 주전 2세기 금관이다. 금관의 상징은 나무와 사슴의 녹각 그리고 새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 유목민들의 샤머니즘의 상징이었다. 나무는 신(태양)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이었고, 사슴은 생명을 주는 신이었다. 나무에 앉은 새는 신과 인간을 오가는 전령이었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 흉노의 금관, 스키타이 황금 인간의 모자에서는 이 새가 빛나고 있다. 신라 금관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중국 한족이 아닌 스키타이와 흉노의 영향을 받았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적으로도 우리 민족은 한족과 전혀 다른 우랄 알타이어족이다. 단재 신채호의 말대로 우리 민족은 “만주, 몽골, 터키 등과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재는 조선족과 중국의 한족은 서로 동족(同族)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현재 우리 민족 씨족들의 기원 상당수는 중국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은 중앙아시아 대륙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우리 민족은 어느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보통 중국 한족은 함족 또는 셈족과 함족의 혼합 계열로 비정한다. 반면 만주를 통해 들어온 우리 민족은 셈족이나 함족보다 스키타이와 흉노의 계열인 야벳족의 피를 물려받았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창적인 ‘불함(不咸) 문화’를 주창한 육당 최남선도 고대 우리 문화의 전파 그림을 흑해→ 카스피 해→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 알타이 산맥→ 사얀 산맥→ 야블로노이 산맥→ 흥앙령 산맥→ 태행산맥 이동→ 조선→ 일본→ 유구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스키타이는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돌무지덧널무덤(일명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보는 무덤 양식이다. 유명한 천마총은 바로 적석 목곽분의 대표적 왕릉이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적석 목곽분과 더불어 스키타이의 순장 풍습이 발견된다는 점과, 최고 귀족들만이 사용하는 당대 최고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스키타이형 동복과 철복이 발굴되고 있는 것도 한반도의 지배자들의 기원을 기어코 만주와 고조선에 묶어두려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집착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또한 잔인한 순장 풍습의 확인은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일부 기독교도들의 황당한 주장을 무색케 만든다. 김해와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그리고 최근 발굴된 창녕의 가야 고분까지, 가야는 최후까지 순장이 성행한 국가였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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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을 닮은 헝가리인들(헝가리는 '훈족의 땅 가리'라는 뜻). 국립중앙박물관의 헝가리 조상 전시물. 헝가리가 마곡 기마민족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조상 "마자르"족도 말 그대로 발해를 세운 부족 중 한 분파인 "말갈족"이다.ⓒ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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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대형 고분과 순장의 풍습은 절대 왕권의 존재를 알려주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무도하고 악한 존재인가 하는 인간의 죄성을 묵시적으로 알리고 있을 뿐이다. 가야 기독교국가설은 이제 조용히 접었으면 한다.
스키타이족은 또한 말을 타고도 활을 잘 다루는 기마 민족이었다. 유효 사거리가 멀고 강력한 ‘맥궁’이라는 화살과 몸을 돌려 쏘는 ‘배사법’을 특징으로 하는 스키타이족은 말을 타고 능숙하게 활을 다루었다.
한자 ‘동이(東夷)’의 ‘이(夷)’는 ‘큰 활’를 의미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의 민족을 의미한다. 이들 스키타이족들의 탁월한 활솜씨가 세계 최고의 양궁 실력을 가진 우리 동이 민족의 활솜씨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이 같은 기마 민족의 기질은 일본에까지 이르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1948년, 한 좌담회에서 당시 도쿄대 교수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 波夫)는 일본 민족의 주류가 말을 타고 달리던 사람들이라 주장하면서, 일본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들고 나왔다.
기동성을 지닌 기마 민족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를 경유한 후 신속히 일본 열도로 진입해 통일국가를 실현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신속히’라는 설정은 일본 주류의 한반도(고구려, 신라, 가야, 특히 백제) 기원을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는 고육책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천황가의 기원도 기마 민족에서 유래한다고 보고 ‘기마 민족 정복국가설’을 주장했다.
전 세계 인종 가운데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 어찌되었든 우리와 늘 애증 관계에 있는 일본 아니던가. 마치 가인과 아벨의 관계요, 에서와 야곱의 관계요, 요셉과 그 형들의 관계요,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와 유사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본래 먼 이웃과 갈등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까운 사이가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한반도와 열도가 그렇다. 그러니 일본에서 신속한 ‘기마 민족 이동기원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한양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고 김용운 교수는 이 같은 한일 관계에 대해 “같은 뿌리에서 피어난 다른 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나 <총·균·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한일의 문화와 언어적 친연성을 지적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일 관계에 얽힌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적 섭리는 무엇일까?
오데사의 인구는 2020년 1,017,699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항구 도시로, 오데사주(Odessa Oblast)의 행정수도이다. 우크라이나의 해양 생명줄인 이 도시를 지켜낸 것은 놀랍게도 고려인 출신의 도시사였다.©조은선
스키타이(우크라이나), 흉노, 한민족 그리고 인류의 한 혈통
아라랏 산 북부로 진출한 야벳의 아들 마곡의 후손들인 스키타이족은 주로 흑해의 북방과 카스피해 사이에서 정착해 번영한다.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바로 스키타이의 중심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동으로 진출하여 유라시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 야벳의 후손들은 성경에서는 마곡, 고대 그리스(폴리스 시대)에서는 스키타이, 중국 진(秦), 한(漢) 시대에는 흉노(匈奴), 수(隨), 당(唐) 시대에는 돌궐(투르크 또는 위그르, 터키), 로마(제정시대)에서는 훈(후니)족으로 불리게 된다.
서울대 명예 교수 신용하 박사는 고조선 문명을 세계 최초 5대 문명의 하나로 보고 주전 108년 고조선이 해체될 때 고조선 서변 국경을 지키던 기마민족 일부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일부가 유럽까지 진출했다는 과감한 주장을 한다. 이들이 바로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Huns, 곧 흉노)이라는 것이다. 모두 마곡의 후손이라는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과 유라시아 기마민족이 문명의 동질성을 가진다는 것은 옳다. 다만 아라랏과 바벨탑 사건을 인류 분산의 기점으로 여기는 성경적 세계관으로 볼 때 고조선 문명이 유럽으로 갔다는 주장은 좀 더 세밀한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흉노는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칭호로 전통적인 동이족을 말함)계열에 속하고, 19세기 이후 발달한 언어학적인 민족계열로 분류하면 몽골어군에 속한다.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현(輯安縣)의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 지역 이름도 통구(通溝)였다. 따라서 이들이 고조선과 친연성을 가진 집단이었음은 분명하다.
흉노가 중국 땅에서 주목 받은 것은 BC 318년 중국 전국시대 제후국인 한(韓)·위(魏)·조(趙)와 함께 진을 공격하고, 그 뒤 중국 땅을 빈번히 침입하면서부터였다. 이에 중국 땅 여러 나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훗날 만리장성이 되었다.
흉노족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선우(單于)라 불리는 단일 지도자 밑에서 광범위한 부족연합을 형성한 때부터였다. 고대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 왕을 ‘흉노의 왕’이라는 의미의 ‘흉노의 선우’라 지칭한 것도 주목된다.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왕실에서 동명성왕의 제사를 지냈을 만큼 일부 부여-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요 가야도 기마민족의 후손이므로, 고조선과 부여의 멸망 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모든 주류는 국내 신학자들이 보는 셈족 계열이 아니요 서구 신학자들과 창조과학의 원조 헨리 모리스(H. M. Morris)가 말하는 함족도 아니요 북방 야벳 계열이 되는 셈이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 못하면서 우리 민족이 막연히 셈족이라는 이상한 영적 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많은 신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우리와 다른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인 나쁜 습성이 과거 있었다.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그런 습성들이 일부 사라진 것은 아주 반가운 현상이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허구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빨리 버려야한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각 지역에서 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온 역동적 나라였으며, 북방 스키타이 계열의 흉노 뿐 아니라 중국계, 남방계, 몽골계, 베트남계, 일본에서 역유입된 왜(倭)계, 심지어는 아라비아계도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혈통을 하나로 만드셨다(행 17:26). 성경적으로 보면 결국 모두 노아의 후손인 셈이다.
마곡 후손들의 미래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순환하며 일정한 진보적 변이를 한다고 보는 것이 세상의 역사관이다. 반면에 기독교 역사관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에 관여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성경적 계시를 모토로 한다. 그런데 창조된 세상은 피조물인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총체적 붕괴를 경험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이 같은 세상 역사를 섭리를 통해 조율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이끄신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역사에 순환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말을 향하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의 은총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경험들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마곡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인류 역사에 관한 일정한 계시의 모델을 보여주신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곡과 마곡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을 상징(계 20:8)한다. 에스겔 38-39장은 마지막 때(38:8) 마곡의 통치자 곡은 아시아와 아프리카(38:5,6; 계20:8)로부터 군사를 모아 메시야의 나라를 침공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그 동기는 사탄의 유혹에 따른(계 20:8-10) 탐욕(겔 38:12)과 교만(계 20:7)이었다. 그 결과, 마곡에 내란이 일어나고(겔 38:21) 하늘로부터 파멸이 임하게 된다(겔 38: 12). 땅은 갈라지고(겔 39:20; 계20:9-11)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날 것이다(겔 38:16, 23; 39:7).
육체적 마곡 후손들이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 백성을 대적한다는 것은 복음과 은혜의 관점에서 있을 수 없다. 즉 이 계시의 구체적 의미는 단순한 문자적 해석에 있다기보다 영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잘 살펴서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하여 종말에 대비해야 할 구절들이다.
오히려 고멜처럼 마곡 후손들도 야벳의 장막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드넓은 유라시아를 차지하고 한때 온 세상을 호령한 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문명사적 창대일 뿐 신앙적 창대는 아니었다. 오늘날 마곡(스키타이)족 후손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잘 모르고 성경과도 멀어졌으며 복음도 잃어버렸다. 일부는 변질된 신을 섬기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스키타이의 피를 이어 받은 우리 한민족에게 부여된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휴전선으로 꽉 막힌 우리 한반도는 육지 진출로가 차단되었다는 점에서 사실 일본 열도보다도 못한 섬나라나 다를 게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북한 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고 스키타이족들이 누비던 만주, 원동, 캄차카, 시베리아, 중국 대륙, 유라시아의 중앙아시아, 위구르, 몽골, 내몽골, 동남아, 서남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 유럽까지 칼과 피가 아닌 십자가의 보혈과 복음을 들고 우리 민족이 달려가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해본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