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기본 원리와 신학자들의 신학방법
신학의 기본 원리와 해석과 신학자들의 신학방법
Ⅰ. 신학(하나님에 대한 이해) 출발의 4 가지 다른 원리(신학 출발의 4가지 방법론)
1. <인간의 이성과 능력 신뢰> 방식: "나는 이해하고, 믿는다"(intelligo et credo).
1) 이 같은 입장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신뢰하고 확신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 없이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자연신학과 연결된다.
2)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한 로마 카톨릭 신학은 바로 이 자연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3) 토마스 아퀴나스가 “은혜는 자연을 찢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고 한 말이 이것을 잘 증거한다.
4) 신앙을 실증적이고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들에 근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창조과학운동”이나 “지적설계운동”도 이 같은 경향이 반영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5) 변증학에서는 이 같은 접근을 험증학(Evidentialism)이라 부르고 있다.
2. <인간의 믿음 선행> 방식: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1) 신학의 출발점을 믿음(fides)으로 보는 입장이다. 즉 신학의 출발점을 창조와 자연과 이성이 아니라 믿음과 특별계시로 본다. 그리고 이 믿음조차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본다.
2)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은 이성으로 믿고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든 것에 선행하며(히11:3)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참된 하나님 인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3) 자연신학이 자연에서 은총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이 입장은 오히려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고 본다.
4) 어거스틴과 개혁주의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5) 코넬리우스 반 틸 같은 신학자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lism)는 바로 이 같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나온 변증학이라 할 수 있다.
좌로부터 칼빈, 루터, 멜랑흐톤(멜랑흐톤 하우스)
3. 인간의 부족함에 따른 <하나님의 초월성, 타자성 강조> 방식: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1) 이 신학은 기독교 진리는 합리적 분석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고 계시를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으로 보고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종교경험을 신앙의 근거로 내세우는 입장이다.
2) 따라서 이 신학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 타자성을 강조하게 된다.
3) 개혁주의와 약간 다른 점은 개혁주의가 계시와 성경과 믿음과 그에 따른 교리의 지도를 따라 신학함과 달리 신(그리스도)와의 초월적 만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4) 터툴리안이나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에게서 이 같은 파라독스적인 신학관을 보게 된다.
칼 바르트(유광웅 교수님 제공)
4.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우선> 방식: “믿기 위해서 나는 이해한다”(Intelligo ut Credam)
1) 일단 성경적인 초월성과 신적 계시를 부정하고 인간의 합리성을 신뢰하여 이성을 따라 이성의 요구에 만족한 것을 따져보고 가능한 것들을 참된 것으로 믿으려는 입장이다.
2) 이렇게 되면 초월적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만 남게된다는 면에서 신학적 자유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Ⅱ. 신비신학의 방법론(부정신학에 대해)
1) 부정신학은 신비주의 신학에 속한 신학으로,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신학이다.
2) 이 같은 부정신학의 기원은 기독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카고대의 버나드 맥긴은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서방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3, 4세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꽃을 피웠다고 보며 13-16세기를 신비주의의 개화기로 이때 신비주의의 고전적 학파들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생각보다 신비주의는 그 역사와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이 역사 속에서 성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신비주의 속에 관여하고 있다.
3) 그런데 맥긴이 3세기를 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us, 175-250)의 두 제자였던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해석의 달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과 신플라톤학파의 실제적 창시자 비기독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205?-270)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들에게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며 현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합일(合一)에 대한 신비적 열망이 나타나는데 플로티노스는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 사이의 합일, 즉 인간의 혼은 탈자(脫自)를 통한 절대적 일자(一者)와의 합일을 이룬다고 본다.
4) 이 같은 합일의 갈망은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초월자이신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개념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신비주의 속에는 전지전능하신 인격자이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플라톤적인 선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만유의 목적인 누스(Nous)의 개념이 혼재해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비체험가들과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과 철학적 하나님을 혼동하는 체험(즉 주관적, 개인적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이 같은 혼돈을 간파한 신학자가 있었다. 유대교 출신 신플라톤주의 신학자 필로(Philo)는 신은 인간 오성(understanding) 너머에 지고지순한 분이기에 무한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형언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신에 대해 인간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신은 이러이러한 분은 아니다’는 식의 서술만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부정철학에서 파생한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다. 인간의 사고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므로 긍정(kataphasis)에 대조되는 부정(apophasis)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려한 이 같은 방식은 6세기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니시우스(행 17:34, 僞디오니시우스)의 이름으로 저서를 유포시킨 익명의 철학자를 통해 훗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승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6) 위(僞)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일체의 규정을 초월해서 선(善)이라고도 존재라고도 할 수 없다. 신은 초선, 초존재로 일체의 형용과 규정을 부정하는 것만이 신에 대한 이해의 길이다. 신을 아는 자는 <무지(無知)의 지>이어야 한다. 이 모든 <부정도(via negativa)> 또는 <부정신학(apophatikē theologia)>은 이후 오랫동안 신비신학의 방법론이 되었다.
7) 스콜라 신학자 존 스코투스의 신학 안에도 무한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함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명제가 보인다. 이렇게 부정 신학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신학 방식이 되고 있다.
Ⅲ. 침례교 신학자의 신학 방법(밀라드 에릭슨)
1. 성경 자료들의 수집
(1) 교리와 관련된 모든 성경 인용절들을 모으기
(2) 성경을 현대화시키는 오류에 주의할 것
2. 성경 자료들 통합
(1) 일관성있는 통일된 진리들 통합
(2) "성경 전체의 내용 모두가 하나의 문맥(컨텍스트)
이다."
3. 성경 가르침들의 의미 분석
(1) 성경 가르침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 "그리스도의 몸"(교회), "거듭나야 한다"(요 3:7)
4.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검토
(1) 신학 역사의 중요성
(2) 신학역사는 신학적 표현들을 세워나가는 데 있어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5. 교리의 본질을 확인하는 일
(1)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구분
(2) 본질과 비본질
6. 성경 이외의 자료 활용법
(1) 주요 자료(원천)로서의 성경, 하지만 유일한 자료인 것은 아니다.
(2) 자연신학을 무시한다고 자연계시까지 무시하는 극단적 치우침 경계
(3) 인간은 완전하지가 않다.
7. 교리의 현대적 표현법
(1)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 언어(상관관계의 방법/ 폴 틸리히)
(2) 본 훼퍼의 "값싼 은혜"
(3) 프랜시스 쉐퍼의 "서구 문명 분석"
8. 핵심적 해석의 논지들
(1) 칼 바르트의 기독론(초월적 만남 사건)
(2) 폴 틸리히의 전재의 근거, 궁극적 관심(예수는 누구인가)
(3) 오스카 쿨만의 "이미와 아직"
(4) 신학의 중심적 주제인 "하나님의 위대하심"
9. 중심적 주제들의 분류
(1) 주된 주제들에 대해 분류하는 일(종말론-주의 재림, 대환난 등등)
(2) 주요한 주제들의 가치 평가 작업
Ⅳ. 주요 신학자들의 신학 방법론(박해경 박사 참조)
1) 방법론
(1) 신학을 전개할 때 인간의 “신앙현상”을 기술하는 것을 방법론으로 삼는 학자들이 있고, 성경과 신조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교리를 서술하는 방법이 있는데 후자는 개혁파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이다. 이 경우 성경을 객관적인 원리로 신앙을 주관적인 원리로 삼는다.
(2) 전자를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방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방법이다. 여기서 어떤 것이 더 과학적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2) 현대신학자들의 방법론
(1) 판넨베르크(Pannenberg)를 위시하여 대다수의 현대신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기독론의 경우 위로부터의 신학으로 하면 이미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하니까 잘못이라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신학방법은 출발부터 “하나님의 입각점”에 서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2) 이들은 역사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간적 상황에서 사고하며 출발해야 과학적 인식론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이 역사적 상황을 뛰어넘지 못하므로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되는 진리를 파악해야 학문적이며 과학적이 된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나 신학이라야 인간의 인식 가능성이 열리게 됨으로 이 방법이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2) 비판
(1) 정통 신학자들이 위로부터의 방법으로 기록된 역사적 신조들의 결론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One Person, Two Natures)의 교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2) 기독교의 중요 교리들은 거의 다 위로부터의 방법에 의해 채택되고 고백되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력이 높지 않은 교인들도 그 교리들을 배우고 깨달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이해함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그렇다면 사실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현상을 무시하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비과학적인 태도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3) 찰스 핫지
(1) 하지(C. Hodge)는 신학을 하나의 학문(과학, Science)이라고 하는 의미를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과학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실(fsct)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idea), 혹은 사실과 지성(mind)이다.
(2) 과학은 지식 이상의 것으로 단순히 사실들을 질서있게 나열하는 것으로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이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지식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3) 신학은 다루는 사실들이 다른 사실들 또는 모든 사실에 대해 가지는 그 내적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학은 어떤 한 가지 사실이 인정된다면 나머지 다른 사실들 역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사실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확인한다. 성경도 신학자가 그 내적 상호관계 속에서 수집하고, 증명하고 정리하고 제시해야 하는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4) 성경신학은 성경의 사실들을 확인하고 진술하나 조직신학은 그것들의 진리성을 입증하고, 조화와 일관성을 보여주며, 상호간 및 다른 유사진리들과의 관계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4) 아브라함 카이퍼
(1) 카이퍼(A. Kuyper)도 두 가지 의미에서 신학이 과학이라고 하였다. 하나는 신학이 지성적인 노력을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는 없으나 하나님에 대해 계시되어진 지식을 보다 분명하게 알도록 인도한다는 점에서 과학이라고 한다. (2) 마치 현미경이 나비의 날개에 대해 아무 것도 더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그 날개에 대한 더 풍성한 지식을 주는 것과 같다. 신학은 하나의 과학으로서 다른 모든 과학의 공통 뿌리에서 격리되거나 잘려나갈 필요가 없다.
(3) 과학으로서의 신학은 신학의 개념들 안에 주어진 것들에 대한 하나의 특수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신학은 과학으로서 자기의 고유한 자리가 있으며, 그것은 과학의 단위에 있어서 그 본질상 하나의 유기체적 멤버로서 정의되는 자기 위치가 있다.
(4) 신학은 탐구대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을 가지며, 이해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과학으로서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을 중생된 마음으로 성령의 빛을 받아 그것을 의식하고 반성하는 논리적 활동이다. 즉 과학으로서의 신학이란 거듭난 인간의 의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계시되어진 지식을 과학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5) 안토니 후크마
조직신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신학하는 방법론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는데, 후크마(Hoeksema)는 신학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한다.
(1) 교회적 방법론(ecclesiastical method)-로마교회의 방법론이다. 일면 교권적 신학인데 교회가 이미 결정한 원리와 결론을 따라가는 신학이다.
(2)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적 방법-교의적 용어나 결정사항들을 따르기보다는 성경자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교회의 신학적 작업을 무시하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할 때 논리적인 사색과 체계화의 필요성을 그 자신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3) 주관주의적 방법(subjectivistic method)-칸트(Kant)와 헤겔(Hegel) 등에 영향받은 것으로 도덕주의나 지성주의, 혹은 신비적 주관주의 등이 있다.
(4) 역사비평적-종교사학파적 방법(religious-historical-comparative method)이 있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 없고, 상대적인 가치만 인정된다.
(5) 바르트학파(Barthians school)의 방법-성경을 신학의 신인식을 위한 계시로 보지않고, 실존적 위기의 순간에 사건화될 수 있는 수단으로만 본다.
(6) 주석적-종합적 방법(exegetical-synthetical method)-이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훅세마는 말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6) 평가
(1) 교권적(교회적) 방법은 학문성이 보장되지 않고, 교회가 이미 결정한 교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이 되기 어렵다.
(2) 그것은 칼빈이 비판한 것처럼 맹신(fides implicita)이 되어 진리를 판단 없이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문제가 있다.
(3) 성서신학의 방법은 성경에서 전체적, 종합적으로 추론하여 교리적 개념을 정리하는 조직신학의 방법을 배격하고, 성경의 시대별, 저자별로 연구하되 주로 역사적 연구를 한다. 조직신학처럼 주제별로 하지 않고, 성경의 본문과 그 배경과 저자의 의도를 찾는데 주력한다. 성서신학에 있어서 보스(Vos)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 과정으로 보고 연구하는 학자도 있으나 여러 가지 비평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그런 경우 성서신학은 여전히 주관주의적이다. 성경 기록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자료에 대한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4) 주관주의와 역사비평적 방법, 혹은 비교종교적, 종교사학파적 방법도 결론은 주관주의 자기 이해의 신학이 되어 성경이라는 근본자료보다 부수적 자료들인 타종교의 경전이나 비평적 연구서들을 동등한 권위로 보는 비과학적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불트만(Bultmann)의 양식비평(Form Criticism)은 소위 “삶의 정황”(Sitz-im-Leben)을 연구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신약성경의 시대의 삶의 정황에 훨씬 더 가까이 살았던 교부들의 진술을 믿지않고, 한참이나 후대의 사람들인 근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더 신빙성있게 채용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과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5) 바르트는 신학이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 성경의 기록이 인간 실존의 위기에서 “말씀 사건”으로 사건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의 성경관이 잘못된 결과로 나타난 주장이다. 그는 자연계시도 부정하며, 성경을 하나의 간증문서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행동자체로서 그리스도 사건만이 계시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화, 혹은 사건화로서의 계시발생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사색에 불과하다고 벌카워(Berkouwer)는 비평하는데 옳은 관찰이다.
"신학의 과학성"(Wissenschaftlichkeit der Theologie)이라는 말은 바르트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의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를 이성으로 재해석하므로 그런 신학은 과학적이 되지 못하고, “말씀” 사건이 일어나는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과학적이 되려면 자연과학의 이론이나 지식들을 알고, 그것들과의 대화와 적응, 조화를 추구하고, 자연신학적 접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견해도 있다.
Ⅴ.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란?
1. 모형론(typology, 유형론, 예표론)적 해석은 구약 성경의 역사는 진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라 보는 해석을 말합니다. 즉 구약 성경의 그림자 같은 역사는 그 원형(原型)이나 구현이 신약성경의 계시에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말씀,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Typen)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신약에 있다는 입장입니다.
2. 모형론적 해석은 이러한 모형(模型, Typos: 구약)과 원형(原型, Antitypos: 신약)의 대조를 통해 구원역사의 연속성을 살펴보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극단적으로 구약의 모든 사건과 역사를 모형으로 해석하여 실제 역사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3. 모형을 나타내는 신약의 단어 튀포스(모형, 롬 3:14; 고전 10:6,11)는 16번 나타나는 데, 못자국(요 20:25), 형상(행 7:43), 표상(롬 5:14), 모형(히 8:5), 식(행 7:44), 본(롬 6:17; 빌 3:17; 살전 1:7; 살후 3:9; 딤전 4:12; 딛 2:7; 벧전 5:3), 거울(고전 10:6) 등으로 번역되고, 스키아(그림자, 골 2:17; 히 8:5; 10:1), 휘포데이그마(사본, 히 8:5; 9:23), 세메이온(표적, 마 12:39), 파라볼레(비유, 히 9:9; 11:19) 등과 같은 용어들도 있습니다. 모형론을 폭넓게 보아 알레고리의 영역에 넣어 다루려는 학자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확대 해석하면 그렇게 볼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약간 그 성격이 서로 다르므로 구별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4. 모형은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신 것(예를 들어 노아 홍수 사건과 소돔성의 롯의 때를 인자의 재림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언급한 누가복음 17장 26-30절을 참조할 것)이므로 연구 가능한 해석 모델입니다. 다만 모형론 해석이나 연구를 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먼저 잘 숙지해야 합니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모형과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구분할 것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나 바울 등이 분명하게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임의적으로 모형이라 말하는 것을 구분해야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그릇된 해석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교리와 관련된 모형과 교리와 상관없는 모형을 구분할 것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부활의 모형임을 예표해주셨습니다(마 12: 40). 하지만 요나가 육지에 다시 선 것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팔레스틴)에서 회복 될 것이라는 예표로 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 말씀하셨다고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해석하고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에 50년 희년을 더하여 1998년을 종말로 해석한 것도 그릇된 적용이요 해석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알레고리적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하게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엉뚱한 시한부 종말론 교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 말씀은 종말의 때를 잘 분별하라는 말씀이지 시한부 종말론의 날짜를 계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모형에도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부분이 있음을 명심할 것
너무 지엽적인 주장을 핵심적인 것으로 몰고 가면 성경 해석의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부차적인 부분을 핵심적인 것으로 집착하는 실수도 조심해야 합니다. 일부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본질적 핵심과 부차적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넷째, 완전히 성취된 모형도 있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모형도 있으며 미래 또는 내세에 이루어질 모형들(주로 요한계시록 예언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열 발가락을 과거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EC 공동체 10개국으로 해석하여 이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오해한 것은 잘못 해석한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5. 과거 일부 사람들이 모형 해석을 확대 적용하여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모형 해석에 대한 일부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모형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합니다. 다만 모형에 대한 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 전체가 모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학문인 신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 됩니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던 이단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성경 해석의 중심을 잡아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탁월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Ⅵ. 알레고리적 해석
- 의미
풍유(諷喩), 우의(寓意), 우화(寓話) 등으로 번역되는 알레고리(allegory)는 헬라어 알레고리아(allegoria,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문학형식을 말한다. 본래 이 말은 헬라어의 ‘다른’이라는 단어인 'allos'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다’라는 'agoreuein'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어원적으로는 ‘다르게 말하는 하나의 방식’을 지칭한다.
2. 다양성
어떤 내용을 표현할 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말하려는 대상의 본체를 감추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방법은 알레고리 말고도 다양하다.
(1)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단어로 결합하는 직유(直喩, simile),
(2)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은유(隱喩, metaphor),
(3)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말을 경험적으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나타내도록 표현(예를 들어 ‘흰옷’으로 우리 민족을, ‘백의(白衣)의 천사’로 간호사를 표현)하는 대유(代喩, synecdoche),
(4)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환유(換喩, metonymy) 같은 비유법이 있는데 알레고리는 신학에서 관심을 갖는 표현기교 가운데 하나이다.
3. 성경의 알레고리는?
(1) 그럼 성경의 알레고리란 무엇일까?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성경의 문자(rhete) 혹은 분명한 것(phanera) 이면(裏面)에 담긴 구절의 실제적 의미(hyponaia)가 존재한다고 믿는 해석 방법을 말한다.
(2)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알레고리 해석을 확대된 은유(metaphor)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3) 예를 들어 신명기 14장 21 후반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는 계명이 나온다. 온갖 재료와 향신료가 제한 없이 마구 섞이는 짬뽕이나 비빔밥류를 즐기고 별다른 음식 계명이 없이 살아온 우리 민족은 이 계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또한 염소 새끼를 어미 젖과 섞어 삶을 일도 거의 없다.
(4) 만인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기록하신 이유는 무얼까? 성경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라 그런 것일까?
(5) 우리 사회라면 어미 젖 이슈보다는 아마 도축법에도 없는 강아지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목사나 성도들이 함부로 영양탕으로 즐겨도 될까하는 문제가 더 쟁점이 될지 모르겠다. (6) 하지만 중요하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염소 새끼와 어미 젖에 담긴 좀 더 확대된 중요한 해석이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4.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일부 기여한 고대 헬라와 유대 사이의 교류
(1)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고대 헬라와 유대 사이의 교류를 통해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2)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주전 170-60년) 같은 학자는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헬라 철학이 오히려 구약, 특히 모세의 율법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가져왔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3) 유대의 필로(Philo, 주전 약 20년-주후 약 54년)는 유명한 유대의 알레고리주의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제롬 등은 알레고리 해석에 능한 초대 기독교 학자들이었다.
(4)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다. 설교도 결국 해석의 적용이다. 따라서 성경 시대의 상황과 풍습에 능하지 못한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유대, 기독교 학자들의 알레고리 해석에 대해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