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신앙/창조 신앙 변증(질의 응답)

신학책에 없는 <과학과 신앙> 관련 3가지 질문(외계생명과 UFO, 성경의 수학적 질서, 창세기 1장 과학과 진화론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 바른 해석은?

성경과학창조세계관신학 2024. 8. 25. 13:46
728x90
신학 저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과학과 신앙> 관련 3가지 이슈와 질문에 대한 참고자료입니다.

 

1. 외계지적생명(문명? UFO? UAP?) 관련 카르다쇼프 척도는 무엇이고, 기독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1) 카르다쇼프 척도(Kardashev scale)란?

 

고도로 발전한 외계 지적 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예상하고 교신 가능성을 다루기 위해, 1964년 소련의 천체물리학자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카르다쇼프(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ардашёв)가 처음으로 제안한 방법입니다.

 

2) 외계생명체는 발견되었는가?

 

(1) 물론 아직까지 지구 외 외계생명체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외계 지적 생명이나 문명에 대해서도 아무런 증거가 지금까지는 밝혀진 사실이 없습니다.

 

(2) 페르미의 역설: 1950년 이탈리아의 유명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는 과학자들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외계인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많은 외계문명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인류 앞에 외계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도대체 "그들은 어디 있지?"("Where are they?")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것을 그 유명한 '페르미의 역설'(Fermi paradox)이라 하지요.

3) 칼 세이건

 

이 카르다쇼프 척도는 미 코넬대 천문학 및 우주공간과학분야 교수를 지낸 칼 세이건이 자신의 저서 <코스믹커넥션>(1973) 속 제 3부에서 외계지성체와의 교신 가능성을 다루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4) 카르다쇼프 척도

 

(1) 카르다쇼프는 교신이라는 목적을 위해 행성 전체에서 현재 동원 가능한 전력 전체에 맞먹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문명 수준을 제 1 유형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지구는 아직 제1유형에도 미치지 못하는 문명입니다.

 

(2) 제2유형은 교신을 목적으로 문명(행성)이 하나의 항성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100% 이용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칼 세이건은 대략 10의 26승 와트의 전력을 사용하는 문명을 말합니다.

 

(3) 제3유형은 교신 목적으로 문명이 은하 전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100% 이용하는 유형으로 이 문명이 우리 행성으로 빛을 보낸다면 그 문명이 우주 어디에 있어도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4) 제1유형과 제2유형, 제2유형과 제3유형 사이의 에너지 격차는 막대합니다. 칼 세이건은 대략 100억 배라 했습니다.

 

(5) 칼 세이건은 에너지 말고도 문명을 분류하는 방식은 축적된 정보의 양(비트)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거라 제안합니다. 카르다쇼프 척도보다 디지털 시대에 더 잘 맞는 제안으로 여겨집니다.

 

5) 그러면 기독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이들 척도는 모두 외계문명을 전제하고 제안된 방식들입니다.

 

(2)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3) 보수 신학은 외계인은 절대 없다고 주장합니다(성육신 등 기독론, 구원론 등이 모두 훼손된다 주장)

 

(4) 반면 유신진화론을 따르는 크리스천 학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당연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이미 외계지성체의 지구 방문이 빈번하며 성경에도 외계인 이야기가 나온다는 신학자가 있는 실정이지요.

 

(5) 그리스도인은 판단자가 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가지나 이상하게도 창조론에 대해서 만큼은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창조주가 된 듯 판단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6)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멈추는 겸손한 자세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7) 외계생명체 가능성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6)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성경:

 

(1) 인간적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과학적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2) 예를 들면 지동설이 맞다는 것, 천체 은하의 구조, 달은 위성, 지구는 행성, 태양은 항성이라는 것, 목성과 토성은 달이 많고 화성은 두 개이며 금성은 없다는것,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 전기전자통신시대가 올 거라는 것, 디지털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 인공 지능(AI)의 특이점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 이 간단한 정보들을 하나님은 왜 일찌감치 친절히 알려주시지 않았던 것일까요?

 

(3) 알려주셨다면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의 신적 유래와 권위와 진리를 인간에게 더욱 확고히 계시하셨을 텐데 말이죠.

 

(4) 특별한 섭리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5) 따라서 성경처럼, 성경이 말하지 않는 외계생명체 문제에 대해서도 신학이나 과학을 들이대며 자신이 판단자가 되려는 성급함보다 겸손히 멈추는 자세가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6) C. S. 루이스는 인간 이외 이성을 갖춘 다른 종이 외계에 존재한다면 그들도 타락? 거기서도 성육신이 필요? 다른 방식의 구속 방식? 등에 대해 오지랖 넓은 해석을 시도하나 부질없는 신학의 확장일 수 있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7)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1) 남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종교학과 교수 로버트 엘우드 2세는 1950년대가 UFO종교의 전성 시대였다고 주장합니다.

 

(2) UFO연구가인 자크 발레는 모든 UFO 현상이 종교적인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3) 태평양 루터 신학원의 조직 신학 교수 테드 피터스 2세(Ted Peters Jr.)는 UFO현상의 종교적 요소들을 수집 분석한 후 현대사회에서 종교적인 요소들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현상은 바로 UFO신드롬이라고 하였습니다.

 

(4) 국내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도 소위 UFO 신학(UFO theology)이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5) 미 노트르담대의 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어난 맥멀린(Ernan McMullin)은 이 쟁점에 대해 신학자들이 과학자들보다 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6) 수십년 간 이 문제에 대해 홀로 추적하고 상담하고 사역해 온 신학자로서 필자는 교회가 보수파, 진보파로 나뉘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는 척하다가 천동설-지동설 실수와 같은 큰 낭패를 당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외계생명체 논쟁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 <UFO와 신비주의>의 저자, 조직신학)

 

2. 성경에 수학적 질서가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신앙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1) 그렇습니다.

 

수학도 하나님의 창조 범위 안에 들어가기에 세상이 수학적 질서 속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사실 오늘날 밝혀지고 있는 생명 속 DNA나 디지털 정보조차 모두 수학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요.

 

2)성경의 성막과 성전과 노아의 방주도 인간이 고안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하신 수치와 계시에 따라 만들어졌지요.

 

3) 성경 1,189장과 31,173절은 본래 지금처럼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장은 13세기 영국의 스테판 랑톤주교가 나누었고, 이후 3세기 뒤 프랑스 인쇄업자 로베르 에스티엔느가 각 장을 절로 나누었지요. 그런데 이들이 구별해 놓은 장, 절과 성경(히브리어, 헬라어)의 숫자값(Numerical Value) 사이에 의미있는 수학적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을 사람들은 발견해 냈지요.

 

​4) 예를 들면 1(통일), 3(질적 완전), 4(창조), 7(양적 완전)은 하나님과 관련되고 6(인간 창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아한 여섯째날), 8(부활, 새질서), 10(서열적 완전성, 창 18:32), 12(거룩한 조직, 창 35:22, 49:28, 마 10:2), 40(시련, 연단) 등입니다. 특별히 19는 인간의 믿음을 상징하고 37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인데 성경에서 유일하게 내용이 같은 장이 열왕기하 19장과 이사야 37장입니다.

 

5) 구약의 수학적 질서에 관심을 가진 최초 유대인 집단을 "카발라"(Kabbalah)주의자들이라 말합니다. 랍비 출신으로 천재 물리학자인 제럴드 슈뢰더 박사는 이들의 본질적인 접근 방식 자체가 수학적이라 말합니다. 1천 년 전 쓰여 진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의 경전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질서가 있더라”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존재와 유한한 창조 세상에 대한 상호작용을 수학적으로 접근한다는 의미겠지요.

참고로 카발라의 "게마트리아"를 일부 살펴보면 "아빠"(민 32:6)는 4, 엘리야는 21(3*7), "헤세드"(amore, 시 23:6)는 72, 샬롬(민 6:26)은 376, 토라(신 31:26)는 611 등입니다.

 

6) 카발라가 구약에만 집중하는 반면, 신구약 성경을 모두 가진 기독교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신적수(​神的 數, Theomatic numbers)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신적수"는 8(새질서, 부활)과 888(37*3<111>*8)로 나타납니다. 시몬 베드로의 물고기 153마리(요 21:11)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물고기들(153*8), 그물(153*8), 내가 곧 길이요(153*8, 요 14:6), 길, 진리, 생명(153*8, 요 14:6)이 모두 8배수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사탄과 관련된 모든 숫자는 276(마 23:33, 지옥, 276*3/마 23:33, 지옥 심판 276*6/중국인들과 좌파들이 좋아하는 용, 계 13:4, 276*6)으로 나타납니다.

카발라는 신약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카발라" 책들을 보면 888이나 276 등과 관련된 게마트리아는 볼 수가 없더군요.

 

7) 헬라의 철학자들도 세상에는 정연한 질서(cosmos)가 있음을 일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코스메오’(cosmeo)에는 단순한 질서나 정리만 아니라 분별력 있는 질서와 아름다움과 조화의 즐거움을 탐미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렇기에 초기 헬라 철학자들이 시작한 자연철학(physica)에서 오늘날 물리학(physics)의 이름이 유래하고 그 헬라가 유럽 과학 탄생의 기지 역할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셌지요.

 

8) 수학의 질서

 

수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수학의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에게해 사모스섬 출신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주전 580년 경-497년)가 숫자의 오묘한 질서를 깨닫고 음악에서 수학적 질서가 있음을 알린 것(도레미파솔라시도 음반을 만든 수학자)이나 만물의 근원을 ‘수’라고 주장했던 것은 놀라운 통찰이었지요.

 

9) 이렇게 물리적 피조 세계의 질서는 반드시 수학적 해석과 설명이 가능하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수학도 하나님의 솜씨를 증거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계시 가운데 하나이며 은혜요 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0) 생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수학을 사용합니다. 오직 인류에게만 종교심이 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요.

 

11) 우연주의 무신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원숭이 같은 유인원들은 우리 인간보다도 더 오랜 연륜동안 진화되어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들 유인원들은 기초 수학도 구사하지 못할 뿐더러 작은 종교심도 없습니다. 종교적 반응과 수학적 추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닮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지요.

 

​12) 결론: 신앙적 의미와 수학의 한계

 

(1) 수학은 다양한 피조 세계 속 유용성을 가진 질서임이 분명합니다.

 

(2) 다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는 분명 부족한 도구인 것도 분명합니다.

 

(3)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삼위일체라는 것이 더욱 큰 신비이지요. 사랑과 삼위일체를 한계를 가진 수학으로 증거하려 하면 더욱 신비의 미로로 빠지게 마련입니다.

 

(4) 따라서 수학적 질서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완전한 도구라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이 있음을 꼭 기억하세요.

 

(5) 오직 성경만이 모든 계시의 근본인 것이지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환경화학공학)

 

※ 참고: 수학은 깊이 들어가면 대중들에게는 대단히 난해한 학문입니다. 여기 수학으로 코딩된 우주에 대해 크리스천 천재 수학자 오일러의 업적과 관련하여, 보통의 언어로 진술해 달라는 제 부탁으로 베를린 공대 수학과에서 공부 중인 제 장녀가 가장 쉬운 언어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잘 살펴보세요. 수학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난해한 영역인지를 아실 겁니다.​

 

<수학으로 코딩된 우주에 대해 크리스천 천재 수학자 오일러의 업적과 관련하여>

 

1. 첫째, 오일러 등식 및 오일러 공식과 관련하여

 

1) 원주율 파이(원의 지름과 둘레의 비율), 자연상수 e(오일러 수), i(허수 : 어떤 수의 제곱이 -1 이 되는 수), 1(의미 : 존재함), 0(의미 : 존재않음)의 조합.

 

2) 특히 허수는 어떤 수의 제곱이 -1 되는 수라서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수라고 생각해서 한국어로는 허수 영어로는 imaginary number 라고 한다.

 

3) 물리학에서 미시세계 양자역학에 대한 여러 식들이 이 수들을 많이 사용한다.

 

4) 특히 기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사용한 수학에선 허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5) 근데 미시 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에 들어서서 슈러딩거 방정식이나 끈이론 등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다.

 

6) 오일러 공식이 중요한 이유는 삼각함수(코사인, 사인)와 지수함수(e)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이걸 이용해서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7)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실수자체는는 수직선 1차원 인데, 허수를 도입함으로서 복소평면(x 축이 실수, y 축이 허수)이 됨으로써 2차원으로 바라볼수 있고 하나의 운동하는 위치방정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2. 둘째, 오일러 베타함수와 관련하여

 

1) 이것도 양자역학과 관련해서 등장한다.

 

2) 오일러 베타함수는 18세기때 오일러가 처음 정의한 함수 인데 오일러 적분이라고도 한다.

 

3) 이것을 오일러가 만든 이유는 n! = 1x2x3x4x5x…… 이걸 팩토리얼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오일러 이전 까지는 정수에서는 정의 되었다.

 

3) 그런데 이 오일러 베타함수와 감마 함수를 이용하면 팩토리얼을 실수범위 까지 확장할수 있다.

 

4) 이 오일러 베타함수가 양자역학에서 중요해진 이유는 CERN에서 일하던 베네치아노라는 이탈리아에 이론 물리학자가 196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서 발표한 건데 S matrix 라고 scattering matrix 즉 입자들의 산란 행렬인데, 강력(강한 핵력 - 자연계 네 가지 기본힘 중 하나,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에 관한 산란 행렬이 오일러 베타함수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한 점이다.

 

6) 이것이 토대가 되어 현재 끈이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후에 일본 물리학자들 남부, 고토가 두 끈이 충돌했을때 나타나는 산란행렬이 베네치아노 모형이라고 설명하면서 끈이론이 시작됨).

 

3. 셋째, 리만 제타함수와 리만 가설의 양자역학과의 연관성.

 

1) 소수(1과 자기만을 약수로 가지는 수, 예를 들면 7, 11, 37 등등)는 수학에서 마치 입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2) 오일러는 이미 리만 제타함수하고 소수의 관련성을 밝혔다 할 수 있다.

 

3) 소수의 배열은 원래 불규칙하다. 근데 소수만으로 만들어진 제타 함수의 영점이 정확히 일직선에 배열되어 있다는 가설을 리만이 쓴다.

 

4) 이것이 19세기에 발표한 리만 가설이다. 이것을 증명하면 소수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그 뜻은 소수에도 규칙성이 있다는 가설이다.

 

5)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소수 분포는 현재 현대 암호기술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양자역학에서 이 리만 제타함수와 리만가설이 중요해진 이유는 1970년대에 프린스턴에서 몽고메리와 다이슨이 양자역학과 이 리만제타함수를 연결시키면서다.

 

7) 이들이 발견한 건 이 리만 제타함수의 영점들의 간격이 양자역학에서 적용되는 원자핵 에너지 분포을 표현하는 수식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8) 현대 수학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수학자 오일러는 여전히 단단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해설: 사진작가 겸 예술가 조은선(베를린 공대 수학과)-

 

3. 과학과 진화론으로 창세기(창조)를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성경은 과학이 아닌 적응의 원리로 기록된 계시

창세기는

16C 시작된 자연과학 발아 이전

자연과학과 진화론을 모르던

역사 속 모든 인류를 위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

과학이나 진화론으로 창조 사건

함부로 판단하면

인간 스스로 심판자될 우려

당연히 창세기 1장을

현대 자연과학의 논리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성경은 자연과학이 발아(發芽)하기 수천년 전,

1600년에 걸쳐 모든 역사 속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 계시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근대과학은 주후 16C 시작되었으며

다윈의 진화론은 겨우 1859<종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으로 수천 년 전 계시된 책을,

그것도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평가하고 수정한다면

성경은 과학자 숫자만큼이나 늘 수정가능한

찢어 발겨져버린 책이 될 것이다.

컬럼비아대 출신 생화학자(의대 교수)

자칭 최고 천재였던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 같은 사람도 기고만장하여

믿음 없이 창세기 해석을 하지 않았던가!

왜 이것이 문제인지,

계시로서의 성경 언어와

성경 해석의 원리를 바탕으로 살펴보자.

-편집자 주-

출애굽한 모세 일행이 거처갔을 요르단 와디 럼, 암각화©조덕영 (사진 생략)

히브리 성경 이전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인류 최초의 언어는?

언어는 어디서 왔을까? 성경은 에덴 동산에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계시된 언어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성경 토라의 언어(히브리어) 이전에도 문자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 인류가 지금까지 확인한 가장 오래된 문자와 언어로는 히브리어 이전 수메르의 설형문자(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세계 최초의 문자 발명 증거가 노출된 곳은 고대 수메르 도시 우륵(현재의 Warka; 성경에서는 Erech, 10:10)이었다.

물론 이 학문적 성과가 곧바로 최초의 인류 문명 언어를 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수고하고 추적해 발견해 낸 현재의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의 언어는 달랐다

노아와 그 가족이 쓰던 언어와 글의 원형이 무엇이고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증거는 성경을 포함하여 오늘날 전혀 추적이 가능하지 않다.

바벨탑 언어 혼잡 사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모세 이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요 이스마엘 후손들의 조상도 되는 아브라함이 히브리어를 창시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을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창세기 대홍수 이후 바벨론에서 언어가 혼잡 된 이래 진정한 언어적 세계 통일은 쉽지 않게 되었다(11:9).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온 땅의 인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언어는 이렇게 바벨탑 언어 혼잡 사건으로 갈라 졌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분명 히브리어가 아닌 자신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하류 갈대아 우르에서 통용되던 언어에 능숙했을 것이다. 그곳은 바로 '쐐기문자(cunéiform)'가 통용되던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주전 3000~4000년 사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계곡에 도시들을 구축하면서 이 문자를 창안했다고 알려진다.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그곳의 문화와 우상에 젖어 바로 이 최초 문자의 영역 속에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 학생들이 기억해야 하는 문자는 600 여개였고 단어와 음절, 한정사를 모두 포함하면 166-188개의 글자에 달하였다.

모세 이전 창조 계시가 없었다고 볼 수 없기에, 알파벳 이전 이 쐐기문자의 한계와 우상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친구아브라함은 창조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손 모세와 그 백성들이 400여 년간 하층 생활을 영위하던 이집트의 상형 문자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익혀야 하는 상형문자가 100여 개밖에 되지 않을 만큼 어휘가 풍부한 문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언어의 부침을 겪었다.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는 분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설형문자보다 풍부한 어휘를 가진 문자는 아니었다. 즉 언어의 엔트로피는 오히려 아브라함 후손들 속에서 증가하였다.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아브라함 후손들이 처한 환경과 문화 코드 속에서 점점 더 그 명료함을 상실해 갔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사용하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의 설형문자와 모세가 사용하던 애굽의 상형문자는 모든 면에서 전혀 달랐다. 즉 모세와 아브라함은 다른 언어로 창조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창조 계시 보존의 험난한 과정

출애굽한 모세 일행이 거처갔을 와디 럼의 풍경©조덕영(사진 생략)

 

이렇게 아브라함 이후 야곱의 후손들은 그들 선조들의 본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보다도 언어적으로 더 낙후된 환경 속에서 종교와 문화적 향유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이방인이요 노예로 살았다.

이 같은 이방인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야곱의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희미한 창조 계시를 보존해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창조 계시는 아담과 하와의 언어”-> “노아 가족 언어”-> 홍수 이후 바벨탑 혼잡 언어속 보존-> 인류 최초 등장한 비 알파벳 문자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의 쐐기문자(일명 설형문자) 아래 다른 신들(우상들, 24:2)을 섬기던 아브라함 조상(아버지 데라 등) 속의 계시 보존(?)->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대하 20:7)의 언어 환경(수메르어?) 속 보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후손들의 이집트 상형 문자와 언어 속 보존(?)-> 출애굽한 모세 집단의 언어(히브리어의 잉태 시기?) 속 보존-> 출애굽 광야 속 알파벳 셈족어에서 파생된 초기 히브리 언어 등장(“토라 생성 시기”)-> 현대 히브리어에 보존-> 성경 원본 상실 -> 다양한 사본(寫本) 속 보존 -> “다양한 역본(譯本)들 속의 보존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생각보다 단순 명료한 창조 계시(창세기 1-11)가 지난(至難)한 과정을 겪어온 셈이다.

 

주전 2세기 아카드어로 기록된 앗수르의 아다드 니라리 1(Adad Nirari 1,)의 비문<베를린 제임스 시몬 갤러리, by Eun Sun Cho>

첫 알파벳의 등장

설형 문자와 상형 문자를 거쳐 역사적으로 흔적이 나타나는 확실한 첫 번째 알파벳은 주전 14세기 나타난 우가리트 알파벳이었다. 현재의 시리아에서 발굴된 이 가나안 셈어군은 문자 모양은 쐐기형이었으나 모양만 닮았을 뿐 모음과 자음의 음가를 가진 알파벳 글자의 원형(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우가리트 알파벳이 수메르-아카디아 철자들에서 파생되어 출현한 알파벳인 반면, 비슷한 시기 이집트 상형 문자로부터 비롯된 알파벳이 시나이반도에 나타났다.

이집트 사람들은 한 문자가 한 단일 자음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글자가 한 자음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알파벳의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귀족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알파벳 체계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한글을 창안 한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복잡한 한문을 선호하던 것과 유사하다.

반면, 원시나이어(원셈어) 알파벳으로 불리는 이 알파벳이 바로 가나안, 페니키아, 아람, 그리스 문자들과 고대 히브리어로 발전된 원시 문자였으니 이 알파벳에서 라틴어와 에트루리아어를 거쳐 현재 유럽의 알파벳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셈어의 원형은 시나이반도에서 파생되었다.

히브리 알파벳의 원형을 가진 창세기와 토라의 탄생

이렇게 문자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면 알파벳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자를 융합하면서 시나이반도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모세(애굽 탈출 시대)와 다윗 시대(가나안 입성 시대) 사이에 히브리인들은 자신들만의 히브리어를 구축해 가면서 원셈어와 여기서 파생된 다른 셈어 문자들의 단어에 담긴 우상 문화 코드들을 구분, 정리하고 히브리 민족에게 계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기술할 필요가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오늘날 인류가 접하는 창세기 1장과 토라가 탄생했다. 이것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온 원시 히브리어 속 보존된 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를 만들었다. 즉 딜레마의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죄악에 물든 인간의 문제였다.

이때는 건전한 자연과학도 진화론도 잉태되지 않은 시기였다. 하나님은 이때 모든 이들에게 적응된 보통언어로 창조와 타락과 홍수 사건을 전하시고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인류 구원의 여정을 계시하신다.

과학이나 진화론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

이렇게 하나님은 창세기의 창조 역사에 대해 자연과학이나 진화론적 판단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류에게 전하고 있다.

성경은 자연과학이 발아(發芽)하기 수천년 전, 1600년에 걸쳐 기록된 책이다. 근대과학은 주후 16C 시작되었으며 다윈의 진화론은 겨우 1859<종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 창조 계시가 과학 시대만을 전제로 준 책은 전혀 아닌 것이다. 과학의 본질과 유용성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 계시의 직접적해석 도구는 전혀 아닌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천문학자들을 위해 주신 책이 아니라 역사 속 모든 인류, 모든 보통사람들을 위해 주신 계시라고 창세기를 주석한 칼빈이 말한 그대로였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눈 높이를 보통 사람 수준으로 낮추셨다는 이 '적응의 원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의 주요 원리였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이나 진화론을 가지고 계시로서의 창세기 창조 사건을 함부로 판단하게 될 때에, 부지불식 간에 자신이 마치 창조주 하나님처럼 창조 사건의 과학적 판단자요 심판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늘 경계하고 계시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

만일 과학적 해석에 집착한다면 또 다른 최신 과학 이론이 등장하면 창세기 1장 해석은 또 달라질 것이고, 성경의 창조 계시(창세기 1)은 과학의 이름으로 늘 계시가 수정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개혁신학자로서, 자연과학이 막 태동하던 16세기를 살았던 성령의 사람들이었던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이 소중한 이유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전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