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과 조용필(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 그 신기한 인연, 신앙은?
좌로부터 조용필, 조영남, 나훈아©중앙일보(조영남 소장)
가수 조영남과 조용필
조영남 씨는 “(나)훈아는 몰라도 용필이와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가까웠다.”고 했다. “첫째는 천하에 웃기는 이주일 형과 친하다는 거였고 둘째는 술”이라 했다. 그러면서 "용필이와 영남이는 우리들의 두목 격인 이주일 형이 특별히 아끼는 동생들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조영남 씨는 “술 먹는 실력에서 용필이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자신은 “이것저것 너저분한 것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용필이는 오직 딱 한 가지 밤새 음악에 관한 얘기”만 해서 멀어졌다고 중앙일보를 통해 밝히면서 그럴 바엔 나더러 “형! 우리 이런 노래 듀엣으로 함께 부르는 게 어때”라 했으면 오죽 좋았으련만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다른 인연의 끈이 있었다.
배천 조씨(조영남)과 임천 조씨(조용필)
남진, 나훈아와 더불어 또 다른 남자 가수의 양대 산맥인 조영남(배천)·조용필(임천)은 송 태조 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같은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다.
조 씨들은 과거 본(本)이 다르더라도 통혼(通婚)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법적 문제는 전혀 없기에, 요즘은 자유로워진 면이 있다. 하지만 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는 조금 다르다. 같은 송 태조 조광윤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유학자요 임진왜란 3대 의병장 중 한 분이었던 중봉 조헌 선생이 배천 조씨였다. 중봉 조헌 소저(所著) 해동명적(海東名蹟) 조천혁 주(註)에 의하면 조헌 선생은 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에 대해 송 태조 조광윤의 후손으로 수강(송 태조의 손자 유길의 제5자, 훗날 고려에서 천혁으로 개명)과 숙부 유고(훗날 고려에서 지린으로 개명)가 함께 호서 지방에 상륙한 같은 뿌리라 설명하고 있다(더불어 진보·평양·양주 조씨도 송 태조의 후손이라 전하는 일부 문헌이 있기도 하여 기록을 남겨둔다) .
NASA 출신 국내 최초 아폴로 박사로 명성을 날렸던 조경철 박사가 이 가문이다. 배천 조씨는 모든 성씨 가운데 최초로 족보를 디지털화한 성씨로도 유명하다. 노벨상에 근접한 원로 뇌과학자 조장희, 한국을 빛낼 100인 개척가에 선발된 공학자 조동호 카이스트 교수, 경희대 설립자 조영식 박사, 교수 자제로 인천대 총장을 역임한 유명한 경영학자 조동성 박사도 이 송 태조 가문이다.
자연과학자 출신으로 최초 서울대 총장을 지낸 조완규 박사, 최초 여검사 출신으로 최초 판, 검사를 모두 역임한 전 국회의원 조배숙 변호사도 이 가문이다. 지금은 로고스법무법인 소속 변호사이자 복음법률가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동네 꼬마 녀석들’로 시작하는 ‘연’(鳶)이라는 가요와 싱어송라이터로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암 기전과 당뇨병연구로 희망을 주고 있는 탁월한 생명과학자 조진원 교수(연세대,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회장)도 이 가문이다. 이 두 가문은 모두 대법원장도 배출하였다.
고려 시대 후반 송에서 귀화하여 배천·임천 조씨는 그 숫자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대비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배출 비율이 대단히 높은 성씨로도 유명하다. 임천 조씨의 경우 현재 인구 겨우 약 1만 5천 여명에 불과하여 인구 대비 0.03%에 불과하나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총 1만 4,620여 명 가운데 42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여 0.29%에 달하였다. 인구 대비 9-10배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구대비로 보면 임천 조씨는 조선 시대 과거급제자 4명 정도를 배출했으면 평균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오히려 장원급제자만 4명이나 있었다.
조국·추미애 이슈와 배천·임천 조씨
최근 이 두 가문은 생뚱맞게도 조국·추미애 이슈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조국(曺國)을 자랑스런 창녕 조씨 남명 조식(曺植) 후손이라 해서, 관련 직계 후손들로부터 큰 반발을 산 인물이 있었는 데, 직계 후손도 아닌 조국을 ‘칼(일명 경의검, 敬義劍)’ 찬 선비였던 올곧은 대학자 남명에 비유한 것은 분명 남명에 대한 모독이었다.
아들 수사를 막으려 3중 4중의 방어벽을 치며 눈물겹게 안간힘을 다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아들에 대해서는 군대의 속성도 전혀 모르고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는 황당한 창작으로 추 장관 아들을 옹호한 자가 있었다. 자랑스러운 역사 인물 중 안중근 의사와 남명 조식을 소환한 이 두 사건은 묘하게도 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 후손들을 소환했다. 무슨 의미일까? 마치 일종의 평행이론과 유사한 교묘한 데칼코마니를 이루어 흥미를 끌었다. 즉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배천 조씨 후예였고, 남명 조식은 임천 조씨 집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끈을 가진 대학자였기 때문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두 아들 안정근, 안공근을 통해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사이토 타이켄 저, 이송은 역, <내 마음의 안중근>, 2002)”라는 답장을 아들 안중근에게 보냈다. 또 조마리아 여사는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하여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거라”고 했다.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으라니! 중봉 조헌을 배출한 배천 조씨 후예답게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다.
조마리아 여사는 일찌감치 신·구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 왕성했던 황해도의 명가 배천 조씨 집안의 후예다웠던 것이다. 배천 조씨는 두 명의 조선 개국공신을 배출하며 조선시대 현달한 인물들이 쏟아졌다. 이 배천 조씨 집안에서 유학자요 임진왜란 당시 3대 의병장 중 한 분이었던 중봉 조헌 선생이 나왔다. 기독교계에서는 장로교 조향록 목사가 있다.
그렇다면 남명 조식과 임천 조씨(ft. 조지서, 조원)는 어떤 관계였을까? 남명 조식(1501-1572)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다만 퇴계와 달리 남명은 임금의 강청에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백성 편에서 세상을 걱정한 생활 철학자요 제자들 양성에 전념한 학자였다. 친히 임진왜란(1592년)을 겪진 않았으나 생시 왜구에 대한 단호한 대책을 촉구하였으며, 놀랍게도 그의 제자 가운데 55명이 왜군에 맞선 의병장이 되었음을 볼 때, 남명이 어떤 학자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 가운데는 남명의 제자요 외손사위로 임진왜란 3대 의병장 중 한 명이었던 곽재우도 있었다. 이렇게 고경명과 더불어 중봉 조헌과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분연히 일어난 국난극복의 3대 선봉장들이었다. 조식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과연 임진왜란 당시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명은 58세 되던 1558년 4월 10일에서 26일까지 지리산(두류산)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그 기록을 <유두류록(遊頭流錄)>으로 남긴다. 여기서 조식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세 명의 대학자를 소개한다. 바로 한유한과 조선 초기 유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 그리고 하동을 대표하는 조선 유학자 지족당 조지서(1454-1504)였다.
성종은 자신의 아들 연산군을 과거에 3번 장원한 당대 수재요 청백리에 뽑힐 만큼 강직한 학자이자 관리였던 조지서에게 맡겼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스승 조지서는 낙향했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상소를 올렸다가 그만 자신의 제자 연산군에게 참수를 당하고 만다. 스승을 참수하다니! 조선 인재의 애석하고 처참한 죽음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조지서는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죽은 관료의 직위를 높이는 일)된다. 조지서의 부인은 정몽주의 현손녀(증손자의 딸)였다.
조지서의 묘©KBS화면 캡처
조식은 “훌륭한 사람에게 어찌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로 시작하는 조지서의 묘비 비문을 지었다. 실제 비문은 낡아서 알아보기 어렵고 <남명집>에 실린 내용이 전한다. 조식의 할머니가 임천 조씨였고 조지서가 임천 조씨였으며, 정몽주의 현손녀로 조지서의 부인이었던 정씨조차 임천 조씨 출신 조식 할머니의 친정 집안 관련 사람이었으니 임천 조씨에 대한 조식의 남다른 애틋함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의병들을 배출한 이준민(李俊民)이 임천 조씨 사위를 맞은 것이다. 바로 명종 19년 약관 20세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한 운강 조원(趙瑗)이었다. 운강보다 7살 연장자인 율곡 이이와 동방(同榜, 일종의 공동 수석)이었다.
이 이준민의 모친이 조언형의 딸이었으니, 조식(曺植)은 바로 이준민의 스승이요 외삼촌(外叔)이었다. 조카의 사위가 장원급제하였다니, 그것도 임천 조씨라니! 조식은 얼마나 기뻤을까? 조식은 조원에게 “서일병증조장원원(書釰柄贈趙壯元瑗, 칼자루에 적어서 장원 조원에게 주다)”라는 서첩을 주었다. 이 임천 조씨 후손이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했다”는 추미애 아들 군 탈영 관련 재수사의 목줄을 쥐고 있던 바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학교 후배요 사법고시 동기인 조상철 전 서울고검장이었다.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조 고검장은 바로 전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부영 씨의 자제다.
조영남과 조용필, 신앙은?
그렇다면 이 두 가수의 신앙은 어떨까? 조용필은 불교에 호감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최근의 동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영남씨는 과거 기독교 전파가 융성했던 황해도 출신으로 신앙을 따라 충청도 삽교로 피난 내려온 부모의 일화를 자주 매스컴을 통해 소개하곤 했고, 서울 동신교회에서 후배 윤형주 장로와 성가대에 선 일 그리고 고 김광석 가수가 동신교회 후배였음을 지면을 통해 알린 적이 있다. 또한 조영남 씨는 선교사 빌리 그래함과 김장환 목사를 통해 선교와 신학 공부를 위해 과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적이 있다. 즉 조영남 씨는 김장환 목사와 가까운 지인임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신학과 선교가 조영남 씨 신앙 여정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 노년의 조영남 씨가 과연 신앙의 본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가면서
아무튼 정상의 이 두 가수가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배천 조씨는 조선 개국공신들을 배출한 가문으로 중봉 조헌을 비롯해 유달리 호국보훈의 인물과 많은 문·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다. 임천 조씨 시조 조천혁은 강감찬 장군을 도와 거란족을 토벌한 공(功)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오늘의 국무총리급)에 올랐던 인물이다. 무신 출신으로 송나라를 세웠던 조광윤의 후손이기 때문일까? 무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송태조는 중국 역사 4대 성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무신이었던 그는 다독을 통해 문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송나라의 탕평과 문예 부흥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정신을 따라 그 후손들도 다방면의 일꾼들로 나라의 밀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사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닌 일찌감치 중국계, 몽골계, 아라비아계, 베트남계 심지어 일본계 등 다양한 성씨들이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로 밀려든 다민족 국가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평이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편협 되고 속 좁은 시선을 버리고 똘레랑스의 정신으로 이 나라가 더불어 하나 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놀라운 부흥의 나라가 되기를 또한 기도한다.
조덕영 박사(신학자, 작가, 시인)